김현<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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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강신재 씨의『난리 그 뒤』(현대문학), 김성홍씨의『음의』(동), 그리고 윤흥길씨의『집』 (월간문학)은 폐쇄된 소설공간 속에 인간의 본능을 아름답게 직조하고 있다. 그 공간 속에 폐쇄되어 응고되어 있는 주인공들의 행위 역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강씨의 주인공은 집안이야 어찌되든 간에 자신의 성적만족만을 채우려는 악착스럽고 바보 스러운 인물이며, 김씨의 아이들 역시 그 마을을 휩싸고 있는 죽음, 불안, 그리고 공포에도 불구하고 놀이에 지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분위기에서 소외된 인물들이다.
윤씨의 주인공들도 허 장 성세로 가득 차 있는 과거 지향적인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의 기이함, 비틀어짐은 그 인물들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압도적인 중압에서 나온다. 거리감을 가지고 사태를 판단하고 거기에서 내려진 결론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현실-환경의 압력이 압도적일 때, 그 속에서 서식하는 인물들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으며, 그 현실을 자기가 택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에서 그 현실과의 대비에서 상당한 회화성을 노출한다.
그 회화성이 주인공들의 내부에 육 화될 때 독자들은 그것을 인물들의 왜 소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연 위의 세 소설에서는 현실의 압력이 완전히 뒤편으로 사라져 소문과 풍문으로만 존재하며 소설의 전면에 나와 있는 것은 강씨의 주인공의 반 치과상태, 김씨의 아이들의 순 진 무구함, 윤씨의 가장과 장남의 허 장 성세이다. 그런 특징들은 그 세 소설가들이 주인공을 각기 다른 계층에서 선택하였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지만, 여하튼 그 세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물들의 왜 소성이며 그것은 본능 집착적인 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미군부대 주변「난리 그 뒤」, 고립된 산 마을「음예」, 그리고 판자촌「집」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가장 첨예하게 혹은 가장 은밀하게 받는 지역에서 작가의「펜」에 의해 차출된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그 지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현실의 중하가 아니라, 이미 그 영향을 받아버린 후의 심리적 갈등이다. 그 갈등이 바로 욕망에의 집착이라는 형태로 심리적인 보상을 받는다. 어떻게 해서 심대한 현실의 중하를 폐쇄된 소설공간 속에 왜곡된 인물들을 통해 아름답게 직조할 수 있었을 까라고 묻는 것은 그러나 헛된 일에 속한다.
정말로 그 소설가들이 보여주고 자한 것은 기지촌 근방 주민들의 한심함도, 아이들의 몰가치성도, 그리고 판자촌 주민들의 허 장 성세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유발시킨 현실과 그 현실에 대응하는 위치에 선 인간들의 함수관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위 세 작가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김용운씨와 황석영씨 이다.
김씨의『에이프릴·풀 3, 4, 5』(현대문학)와 황씨의『적수』(월간중앙)는 위의 세 작품과 다르게 현실의 중하를 전신으로 이겨내려고 애를 쓰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로서는 그렇지만 김씨의 직선적이고 의도적인 표현보다는 황씨의 애매 모호하며 끈질긴 표현에 더 애착이 간다. 그 이유는 이렇다.
김씨의『에이프릴·풀』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도식화된 사회현실이다. 그곳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실 된 것과 진실 되지 않는 것, 허위와 진실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으며 작가자신은 그런 구분 위에서 나쁜 편을 통박함으로써 독자들과 함께 통쾌감을 맛본다.
그러나 예술작품으로서의 함정은 거기에 있다. 예술가는 독자들에게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 스스로가 그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제시하여 혹은 분노하고 혹은 애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작품이 갖는 근본적인 모호성은 거기에 연유한다. 예술작품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는 것을 수학 가처럼 명확히 계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계산해 내려는 의지를 독자들에게 부여하여야 한다.
황씨의『적수』는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꼽추로 표상 되고 있는 억압받고, 지배되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도록 강요받는 계층 속에 무한한 가능성과 힘이 있다는 것을 그 소설은 독자들에게 인지케 한다. 그래서 그 억압받는 계층이 억압하는 계층의 단순한 반사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까지를 포용할 수 있는 내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그 소설은 보여준다. 그 내적 힘은『적수』에 한해서 말한다면 연민이다.
그 연민을 통해 지배층의 허 장 성세는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미래에의 무한한 가능성이 보여진다.
『적수』에 그려진 꼽추는 채만식의『탁류』에 그려진 꼽추와 함께 기억할만한 주인공으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세기씨의『바람과 놀며』(현대문학)와 김이연씨의『동행의 의미』(신동아) 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다.
그 두 여류작가가 그 소설들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이씨는 감각적이고「템포」빠른 문장으로 생활의 때가 끼지 않는 원초적인 사랑이 실제생활에서 가능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김씨는 상대방의「에고이즘」이 끝까지 남아있을 때도 부부간의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을 이씨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여주인공을 통해 묻고 있으며, 김씨는 미국병에 걸린 남편을 가진 한「인텔리」주부를 통해 제기한다. 나로서는 이씨의 주인공이「마르그리트·뒤라스」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사랑을 상황과 결부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김씨의 주인공이『환희의 계절』에서처럼 이상심리로 떨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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