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제26화>경무대 사계(49)황규면<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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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다시 경무대로>
김포에서 비행기를 내려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은 홍진만장이었다. 90일간의 전쟁이 남긴 상흔은 말할 것도 없고 화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비록 폐허뿐이지만 옛집을 찾아오는 마음은 가볍기 한량없었고 한편으로는 감격의 눈물이 두 뺨을 흘러내렸다.
사실 서울을 떠나는 길은 그처럼 무겁고 암담하게 느껴지더니 이날 서울에 다시 입성하는 길은 하늘을 날듯이 가벼웠다.
이 박사는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차창을 내다보며 김포가도를 달렸다. 마포에 부설된 부교를 건너 이 박사의 자동차는 중앙청에 이르렀다.
이때 이 박사가 탄 차는 「맥아더」장군이 보내 준 「카키」색 군용차였다.
정오쯤에 중앙청에 도착하자 곧「메인·홀」로 들어갔다 .천장의 「돔」에서는 깨진 유리 파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맥아더」장군은 이미 와 있었다. 단상에 오른 이 박사는 「맥아더」장군과 서로 얼싸안았다. 이 감격적인 포옹장면은 아직까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맥아더」사령관이 탈환한 수도서울을 이 대통령에게 반환한다고 말하자 이 박사는 「맥아더」가슴에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달아 전공을 치하했다.
그 전날 밤 훈기표본이 없어 나는 이 훈장의 훈기(citation)를 미국대사관의「노볼」박사에게 물어「타이프」로 쳐 미리 준비했었다.
그때 「메인·홀」에 참석했던 사람은 이 박사이외에 조봉암 국회부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그리고 각 부 장관이었고「맥아더」 장군과 그의 막료인 「워커」장군,「아먼드」장군도 자리를 함께 했다.
역사적인 수도 양도 식이 끝나자 이 박사는 경무대로 향했다. 경무대는 전쟁이 훑어간 상흔치고는 비교적 상처가 덜했다.
그러나 북악산 상공엔 미전투기들이 간간이 폭격을 가하며 잔비들을 쫓고 있었다. 언제 공비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형편이건만 이 박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비원이라야 경관 5명과 비서인 나, 그리고 관저를 소제하는 사람 몇 사람뿐이었다.
그때 부산에서 내가 이 박사를 모시고 오게 된 것은 사정이 있었다. 비행기 좌석이 하나밖에 여유가 없어 누가 이 박사를 수행할 것 인가고 얘기가 있었다. 나는 서울을 떠날 때 너무나 황급히 이 박사를 모시게 되어 비서들 중 나 혼자만은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떠나와 가족들의 안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 남은 좌석이 우선적으로 배당됐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보다 이틀 먼저 경무대 청소 등 손질을 위해 떠났던 사람들이 도착해 보니 본관 부속건물 할 것 없이 온통 배설물로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냄새가 코를 찔러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는 얘기였다.
이것들을 치우고 청소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박사가 도착했을 때는 말끔히 치워졌지만 그래도 냄새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옛말에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고 달아날 때는 배설물을 사방에 버려 놓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틀림없이 괴뢰군의 소행이 아니었던가 생각됐다.
다음날 아침. 멀리서는 포성이 쉬임 없이 들리고 있었지만 햇볕은 유난히 맑고 깨끗했다.
이날 아침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이 박사는 황황히 피란 길에 오를 때 평소 애지중지 귀여워하던 애견 「해피」를 두고 떠났다. 그 개가 어디선지 수척한 모습으로 쫄랑쫄랑 달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북괴군이 경무대에 들어왔을 매「해피」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것이다. 아마 주인인 이 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디론가 피해 달아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때 중앙청 서편에서 난데없이 불길이 타올랐다. 불길은 어떻게 휘어잡을 수도 없었다.
이 박사는 불길을 보더니 버럭 역정을 냈다. 불을 끄지 않고 무엇들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전쟁이 지나간 서울거리 어디에서 소방차를 불러온단 말인가 고 그러나 이 박사에겐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방도도 없고 그저 시늉만 하며 역정을 피할 수밖에.
서울시내는 차츰 안정을 회복했다. 바로 다음날인가 정확히는 기억되지 않지만 하루는 이 박사가 나를 부르더니 시내 사정을 돌아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이기붕 시장이 경비용으로 쓰라고 보내 준 낡은「세단」을 타고 시내를 둘러 봤다. 시민들의 안색은 비록 창백했지만 다들 생기에 넘친 눈으로 길을 쓰는 등 어지러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보고를 들은 이 박사는 아무 말도 없이 그 길로「마담」과 함께 차에 올라 경무대를 나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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