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국회 존중' 메시지 … 민주당 "정답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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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취임 후 첫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매년 정기국회 때마다 시정연설을 하겠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이후 정국이 더욱 얼어붙고 있다. 박 대통령은 18일 시정연설에서 야권이 요구해 온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특검 수용, 국회 국정원 개혁특위 신설 등에 대한 입장을 포괄적으로 밝혔다. 종전보다는 다소 유연해진 채로 야권에 ‘햇볕’을 보냈지만 외투를 벗기는 데는 실패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대선을 치른 지 1년이 돼 가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최근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포함해 무엇이든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 합의점을 찾아주신다면 저는 존중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주신다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강조했다. “정치의 중심은 국회다. 국회 안에서 논의하지 못할 주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서다. 그러곤 “국회를 존중하기 위해 앞으로 매년 정기국회 때마다 직접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어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야당에 손을 내민 것”이라며 “내년 예산안과 민생법안 처리를 위해 현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을 심사숙고해 펼쳐 놓았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도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여당에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야권과 합의에 나서 달라고 주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박 대통령은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안들에 대해 이른 시일 내에 진상을 명확하게 밝히고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는 대로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해 특검보다 검찰 수사를 통한 진실 규명 쪽에 무게를 뒀던 기본 입장은 유지했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 이후 민주당의 국회 국정원 개혁특위 설치 요구에 대해 전향적 입장을 내놨다. 유일호 대변인은 긴급최고위원회의 후 “국회 정상화를 전제로 국정원 개혁특위를 수용할 수 있다”며 “특위의 형식과 내용을 포함한 전반적인 내용은 원내대표가 전권을 갖고 야당과의 협상에 임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검 도입 요구에 대해선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이면 형사재판에 관여할 수 없고, 또 다른 정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수용 불가란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민주당은 박 대통령의 연설 직후 오히려 고강도 투쟁을 예고했다. 김한길 대표는 “시정연설에서 희망의 빛을 보지 못했다. 말씀은 많았지만 정답은 없었다”며 “미지근한 물로는 밥을 지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의 특위 수용 입장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는 “특검을 통한 진상 규명과 특위를 통한 재발 방지는 ‘자웅동체(雌雄同體)’”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특검 없는 특위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였다.

 민주당은 두 차례의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끝에 이른바 법안·예산 투쟁을 고강도로 벌여 나간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여론의 역풍을 우려, 국회 보이콧 또는 장외투쟁은 피하고 원내를 투쟁 무대로 삼기로 했다. 우상호 의원은 “그동안 지도부가 전략 없이 우왕좌왕해 사실 이제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나가도 이제 어디로 나가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주당은 이날 황교안 법무부 장관 해임 건의안과 남재준 국정원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일 시작되는 대정부질문에서도 대여공세를 강화할 예정이다. 최고위원회의에선 국회 상임위에서 당분간 법안 처리에 나서지 말라는 금지령도 내려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날 오후 아파트 수직증축을 허용하는 주택법 개정안을 논의할 국토교통위원회가 열리지 않았고, 정무위도 취소됐다.

 내년 예산안, 각종 법안 처리 전망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당면한 문제 가운데선 전년도 결산안이 역대 가장 늦게 처리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4년 국회법을 바꿔 9월 정기국회 이전에 전년도 결산안을 심의·의결토록 한 조기결산제도가 도입된 후 결산안 의결이 가장 지연된 건 2004년(12월 8일 처리)이었다. 올해는 국회 상임위 상황이 불투명해 결산안 의결이 이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다.

 표면적으론 여권에 강경론이 득세하고 있지만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물밑채널까지 단절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민주당이 국회 보이콧 또는 장외투쟁을 선택하지 않은 이상 국회 정상화와 특검 도입 문제를 맞물려 놓은 채 양측이 벼랑 끝 협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에선 “여권에 ‘이대로 가다간 예산 편성도 못하고 준예산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들면 새누리당이 뭔가 다른 사인을 보낼 것”(진성준 의원)이란 말도 나왔다.

글=신용호·강인식·권호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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