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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사랑의 교도보」 23년-인천 소년교도소 홍종식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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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교도관이 스스로 푸른 수인복을 입고 다닌다. 수인과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함이란다. 인천소년교도소 충의소년단장 홍종식 교도보(47)의 별난 모습이다. 『사랑과 지성』이란 생활신념으로 인천 소년교도소를 지켜온 지 꼬박 23년.
그는 행형사상 처음으로 교도소 안에 모범 소년수 만을 뽑아 소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이 어린 죄수를 사랑으로 감싸 목사로, 교수로 길러냈다.
지난 12일. 홍 교도보에게는 다시없는 명절이었다. 충의소년단 창설 20주년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우연이랄까. 이날 소년단 창설 20주년 기념일에 1만번 째로 소년수 김모군(17)이 소년단에 입대했다.
홍 교도보는 여러 단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신입단원 김군의 수인복 깃에 무엇인가를 달아줬다. 그는 자기 수인복에 달고 다니던 수인번호 10,000번을 김군에게 넘겨준 것이다.
희끗희끗 머리에 새치마저 눈에 띄는 홍 교도보는 매일 아침 6시 30분부터 어김없이 일과를 시작한다.
기상 「벨」소리와 함께 소년수들은 잠자리를 헤치고 고요한 감방서 뛰쳐나온다.
순식간에 이방 저방에서 쏟아져 나온 소년수들이 순식간에 연병장 가득히 줄지어 선다.
홍 교도보는 운동장 연단에 올라서서 인원점검을 마치고 군대식 경례를 받는다. 소년단 「밴드」에 맞추어 국기 게양.
그리고 소년수들을 인솔, 식당으로 가 함께 아침을 든다.
상오 8시. 소년단 교련시간이다. 교양강좌도 맡는다.
개개 소년수마다 얽히고 설킨 개인상담에 지혜를 짜내기도 한다. 독서지도·병간호·일과정리… 하루해가 짧다.
밤 9시 취침 「벨」이 울리고 교도소는 적막 속에 싸이게 된다. 얼핏보면 소박한 듯한 하루.
이 시각쯤에서야 홍 교도보는 감방을 등에 두고 육중한 철문을 나선다. 『매일 듣는 그 감방문 소리가 뼈 속을 파헤치는 것 같다』고했다.
23년 전인 1949년 4월 10일 인천교도소가 문을 연 날 홍 교도보는 이곳에 부임했다.
교도관 생활 만 2년만에 이곳에 전출된 것이다.
그때 나이 22세. 『교도관복에 눈알을 부릅뜨면 호랑이였다』는 한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각종 범죄수법, 교도소의 악습에 관한 소년 수들의 불평, 전과자들에 대한 사회의 냉대, 범행동기 등등…. 강좌라는 것도 판에 박은 것이었다. 그는 처벌만으로 소년수들을 참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깨달았다. 사회로부터 그들을 격리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 못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회의 냉대가 재범자를 누범자로 만드는 경우도 수없이 보았다.
결국 「사랑의 교도」만이 참사람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끔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홍 교도보는 우연히 「보이·스카우트」를 생각해보았다.
한참 배우고 활동할 소년수들에게 「보이·스카우트」 정신을 불어넣어 교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그러나 말단 교도관인 홍씨에겐 힘에 겨웠다. 과연 어떻게 교도사상 혁신적인 교도책을 정책에 반영시킬 것인가가 문제였다.
뜻밖에도 법무부 고위당국에서도 대찬성이었다. 드디어 1953년 7월 28일 소년단을 조직해도 좋다는 승낙이 났다.
세계 행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푸른빛 수인복을 소년단복으로 바꾸어 입히고 깡통을 가위로 잘라 소년단 휘장을 만들었다. 근처농가에서 장대를 얻어다 의장대용 장총의 시늉을 내기도 했다.
교도소장의 특별 배려로 낮에는 교도소 밖 근처 농가에 나가 단원들이 일손도 거들었다. 한 가을철에 3만 2천원이 생겼다.
「트럼펫」「드럼」「클라리네」등 악기 8점을 사서 8인조「밴드」까지 조직했다.
홍 교도보가 한참 신명이 날 때 무거운 시련의 날이 왔다.
소년 단원인 소년수 46명을 무장감시 교도원 없이 홍 교도보 혼자 8km떨어진 인천시내에 있는 검찰지청까지 도보로 데려가야만 했다.
홍씨는 단원 1명이라도 탈출하면 옷 벗을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고 한다.
검찰지청 주변의 청소작업을 마치고 일행은 교도소가 보이는 독쟁이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교도소 간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무 사고 없이 전원 무사히 돌아간 것이다.
홍 교도보는 신념이 생겼다. 그 결과 충의소년단을 「보이·스카우트」경기연맹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했고 54년에는 국제연맹에도 가입시킬 수 있었다.
55년 여름부터는 국내 「보이·스카우트」의 「캠핑」대회에 충의소년단의 의장대 시범경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년단원 1백 50명을 이끌고 대외활동을 할 때마다 홍 교도보는 마음을 죄었다.
이탈의 걱정 때문. 그러나 홍씨의 감시가 있는 듯한 단원은 재빨리 홍씨 옆에 바짝 붙어 다니며 안심시켜 준다는 것이다.
61년 여름 하오 늦게 교도소 담 밖에서 풀 베던 소년수 1명이 달아났다.
교도소 안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됐다.
홍씨는 다른 교도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년단원들을 수색대로 풀기로 결심했다.
죄수가 죄수를 쫓는 추격전.
홍씨는 80명의 단원들에게 뿔뿔이 헤어져 청학산을 뒤지고 밤 11시 송도유원지 정문 앞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밤 11시 30분쯤 도망친 소년수를 잡은 소년단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집결했다.
홍 교도보가 소년수들의 뒷바라지에 정신을 쏟자 자연히 가족은 그만큼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앓는 소년수에게 약을 사주고 생일을 맞는 소년 수에게 「파티」를 열어주기 일쑤였다.
홍씨가 베푼 사랑이 열매를 맺어 지금까지 소년단원 출신 1천 3백 65명이 국제 「보이·스카우트」연맹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소년단원이었던 사람 중에는 단 한사람의 재범자도 없었다. 단원시절 탈주자도 없었다는 것이다.<인천=박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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