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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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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보름 끈 의제합의>(2)
의제결정은 7월16일의 제4차 본회의에서 약간의 진전을 보았다. 전일의 제3차 회의에서 공산측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의제에 꼭 삽입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남일은 『38선은 환상적이 아닌 기존경계선이며 전쟁도 이 선에서 발발했기 때문에 여기서 정전해야하므로 반드시 의제에 올려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이」제독은 국제적십자의 포로수용소 방문문제를 가지고 공산 측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유엔」군 측은 인도적 입장에서 『국적의 포로수용소 접촉』을 의제 첫머리에 넣도록 요구했는데 이것은 공산 측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북괴는 남침 18일 만인 1950년7월13일에 「유엔」사무총장에게 「제네바」협정원칙을 준수하겠다고 통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이」제독은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공산 측이 왜 이 문제에 있어서 전후가 모순되는 입장을 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다그쳤다.

<궁지에 몰린 남일, 옹색한 변명>
그러나 「조이」제독은 국적의 포로수용소 방문건은 나중의 『일반 포로』의제 속에 포함시켜 다룰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유엔」군 측으로서는 공산 측에 돌파구를 열어준 중요한 양보였다. 이런 양보에 호응하는 듯 공산 측은 16일 회의에서 고집해오던 『38선 군사분계선』어휘에서 『38선』을 빼고 의제에 그냥 『군사분계선 획정』으로 올려도 좋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남일은 의제에는 『38선』을 못박지 않지만 앞으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의될 때에는 반드시 38선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도록 주장하겠다고 다짐했다.
남일의 이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 의제가 확정되고 군사분계선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때 공산 측은 미친 듯이 38선을 들고 나와 회의는 여러 번 결렬에 직면했었다. 공산 측은 정치문제인 외국군 철수도 의제에 넣으려고 갖은 술책을 다했다. 이 문제를 가지고 16일부터 21일까지 양측사이에는 요지 다음과 같은 설전이 벌어졌다. (주=20일은 홍수로 휴회) 먼저 남일은 이 문제에 대해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한국전 재발을 막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모든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은 전 세계인민의 한결같은 요구사항이다. 외국군대들이 한국전에 개입했기 때문에 우리자체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한국에 평화를 회복할 수 없게되었다. 「유엔」군 측은 한국전이 휴전된 후 외국군을 관광이라도 시키려고 남겨두려는 것인가? 그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모든 외국군의 철수는 한국전 재발을 막는 데 있어 기본조건이다. 이것은 우리의 부동의 입장인 것이다.』
「조이」제독은 남일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리 있게 통렬히 반박했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는 외국군이란 한 명도 없었다. 역사는 분명히 외국군 없이 한국전이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외국군이 없어야만 한국전 재발방지를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은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6·25전쟁은 외국군이 없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공산 측 주장은 완전히 본말을 뒤엎은 것이며 아무런 타당성이 없고 이치에도 닿지 않은 말이다. 더우기 우리는 2차대전 후 얼마동안 한국에 외국군이 주둔했던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이때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는가? 귀측은 외국군주둔은 한국사람으로 하여금 자체문제해결을 방해한다고 주장하는데 1950년6월에 발생해서 계속되고 있는 이 한국사태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한다는 것인가?
한국으로부터 즉시 모든 외국군을 철수한다는 것은 1950년6월과 같은 상태로 환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전쟁 재발방지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남일은 다시 이렇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표면상으로 본다면 1950년6월25일에 한국에는 외국군은 없었다. 그러나 6월25일 사건과 그 후의 사태발전을 보면 6월25일부터 다수의 외국군이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우리가 항상 주장하는 국내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가로막고 이 전쟁에 여러 관계 외국들이 말려들게 하였다.

<정치적 선전효과 노려 생떼>
쌍방당사자의 한쪽이 「조선인민공화국」영토 안에 깊숙이 침투하여 중국의 안전을 직접 위협하게 되자 비로소 「중국의용군」이 외국간섭과 싸우는 우리를 도우려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외국군철수문제는 휴전회담에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런 권한도 없었다. 「유엔」군 총사령관인 「리지웨이」대장은 전황여부에 따라 「유엔」군의 진격이나 후퇴를 명령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유엔」군을 전면 철수시키는 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휴전회담은 내용은 어떻든 형식상으로는 쌍방군사령관 주관 하에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외국군철수문제는 보다 차원이 높은 정치회담에서 다루어야 함은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공산 측이 이를 끈질기게 들고 나온 것은 물론 정치적 선전효과를 노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은 후에는 타협으로 나온다. 이것은 이미 기자출입과 개성중립화문제, 그리고 군사분계선의 의제삽입 토의 과정에서 증명된 대로다.
7월21일의 제8차 회의가 끝날 무렵에 남일은 3일 동안의 휴회를 요청했다. 이 문제도 이만큼 「클로스업」시켰으니 이제 최종적으로 북경과 「모스크바」의 훈령을 기다리는 시간 여유를 얻자는 술책이었다. 예상대로 재개된 25일의 제9차 회의에서 남일은 외국철수문제의 의제삽입 주장을 철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강변하였다. 『전체평화애호 인민의 숙원인 한국휴전을 조속히 성취시키기 위해 우리는 외국군철수문제는 다른 회담에서 토의해결하자는 귀 측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 외국군철수문제와 우리가 성취하려는 휴전과의 뿌리깊은 관계에 비추어, 그리고 한국참전 외국군병사들이 휴전 후 조속히 귀국하여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우리는 이렇게 동의하는 것이다.

<양보하면서도 단서 붙여>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양측간에 합의를 본 4개 항목 의제에 「쌍방관계국정부에 대한 건의」항목을 추가하고, 이 속에 휴전발효 후 조속히 관계국 고위회담을 열고 외국군의 단계적 철수를 협의하도록 권고한다는 것을 삽입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조이」제독은 공산 측이 제안한 추가항목을 충분히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유엔」군 측으로서는 이 추가항목에 별 이의가 없었다. 이래서 7월26일의 제10차 회의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5개 항목의 의제에 비로소 합의를 보았다. ①의제의 채택 ②정전의 기초조건으로서 남북간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 위한 군사분계선의 구획 ③휴전감시기관의 구성, 권한·기능을 포함한 정전 및 휴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 ④포로에 관한 조치 ⑤쌍방의 관계 각 국 정부에 대한 권고.
알다시피 7월10일의 첫 회의에서 의제로서 「유엔」군 측은 9개 항목을, 그리고 공산 측은 5개 항목을 각각 제안했었다.
(주=본 연재291회 참조) 의제채택에 있어서 가장 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 군사분계선구획과 외국군 철수문제였고 다른 의제는 별 말썽 없이 채택되었다. 공산 측은 의제 제2항 결정에서 『38선』어구를 삽입하려고 고집하다가 결국 철회에 동의했지만 이 문제를 실제로 토의할 때는 계속 38선 정전을 주장하겠다고 못박았고 그들은 사실 그대로 했다. 만약 『38선』이 그대로 의제에 올랐더라면 기정사실로 인정되어 군사분계선은 꼼짝없이 그 선에 따라 그어야 할 만큼 이 문제는 극히 중요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난관이었던 외국군철수문제도 공산 측은 마지막 단계에 가서 정식 의제에는 올리지 않기로 했지만 그 대신 의제 제5항목의 건의사항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한편 「유엔」군 측은 의제에서 포로문제를 세분하여 『국적의 수용소방문』을 우선적으로 내놓았는데 공산 측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치자 양보하여 이 항목을 제4항의 『포로에 관한 조치』속에 한데 묶어버렸다. 처음에 회담전망을 낙관했던 「유엔」군 측으로서는 의제를 확정하는데 만도 이렇게 진땀을 빼야했다.
그러나 앞으로 넘어야할 수많은 고개 중의 하나를 넘은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때의 심경을 「C·터너·조이」수석대표는 그의 저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수법』(How Communists Negotiate)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0회 째 회담서 의제채택>
『7월26일의 10회 째의 회담에서 의제는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나는 이날 7월10일의 첫 회담이래 처음으로 홀가분한 기분으로 회의장소에서 심호흡을 하였다. 안도감에 잠기면서 남일에게 권연을 한 대 건네주려고 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소를 지으며 무슨 말을 할 듯 했으나 다만 입술만 움직일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남일의 동작은 「아니…좋습니다」라는 표현이었다.』
◆주요일지(1951년8월3·4·5일)
※8월3일 ▲금성남방서 격전계속 ▲18차 휴전회담 무진전 ▲문교부, 매월 7천권씩 일본서적 구매허가 ▲부산서 휴전반대 궐기대회 ▲「베를린」사태 긴장
※8월4일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측은 중공군의 중립지대출현에 항의 ▲「리지웨이」 사령관, 적군은 중부서 대공세준비중이라고 경고 ▲중공계대공보, 공산 측은 군사분계선문제 양보 않는다고 보도 ▲「타스」통신, 미국이 한국평화 방해한다고 비난.
※8월5일 ▲원산만 일대에 함포사격과 폭격감행 ▲「유엔」군 측, 중립지대 침범이유로 휴전회담중단 ▲미국무성도 「리지웨이」의 회담중단조치지지 ▲공사 1회 졸업식 ▲소련각지, 재한중공군의 대규모 기계화를 주장한 팽덕회논문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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