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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초심 깃든 토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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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내 책상 위에는 앙증맞으리만큼 작은 백자 화병이 하나 놓여 있다. 그런데 그 화병에는 유약이 발리지 않은 채 흙의 질감이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손가락 자국 세 개가 밑동 부분에 남아 있었다. 물론 실수로 잘못 만든 것이 아니었으리. 그 작은 백자 화병에 뺑 둘러 유약을 바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웠겠나? 아마도 그 작은 백자 화병을 만든 도공은 그것에 뭔가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으리라. 아니 치기 어린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너무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것보다 이렇게 뭔가 빠진 듯, 빈 듯한 것이 왠지 더 살갑게 느껴지지 않는가.

 # 나는 그 작은 백자 화병을 빚어낸 이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여러 해 전 그의 자기 굽는 터를 찾아가 본 기억이 있다. 거기에는 직접 흙짐을 져서 손으로 만든 가마와 더불어 한 사람 눕기에도 버거운 한 평 남짓한 방이 딸린 토막(土幕)이 있었다. 특히 그 토방의 아랫부분에 대충 구멍을 뚫고 거기에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세워 엮은 뒤 그 위에 한지를 발라 마감한 거칠고 둥그스름한 봉창을 잊을 수 없다. 정말이지 그 한 평 남짓한 토방에 누우면 잠들어 뒤척거리다 발로 봉창을 찰 수밖에 없어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는 우리 옛말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만큼 작고 겸손한 방이다. 하지만 얼기설기 만든 봉창의 문 창살 사이로 달빛이라도 스며들면 그 아련한 느낌을 뭐라 형언할 길이 없다. 어쩌면 흙 묻은 손과 발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그 토방에 누워 새우잠을 자다 여러 차례 봉창을 두들겼을 도공의 삶을 떠올리면 그 봉창이야말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창이 아니었겠나 싶다. 아울러 그 봉창이 난 한 평짜리 토방에서 도공은 삶 속에 깊이 각인되고 스며든 자기만의 예술혼을 불 지폈으리라.

 # ‘하얀산’이란 뜻을 담아 ‘희뫼’라 불린 가난한 도공이 그 토막을 지을 때 나무며 황토는 직접 조달하고 그나마 들인 돈이라곤 쇠못을 사는 데 쓴 2만8000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지금은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협력해 큰 집 여러 채를 지어 예술인 마을을 만들고 있다기에 찾아가 봤다. 그날 따라 가을추수 하듯 잘 익은 온갖 도자기들을 가마에서 꺼내는 날이었다. 직경 50㎝가 넘는 큰 달항아리에서부터 앙증맞게 작은 다기(茶器)에 이르기까지 희뫼가 흙으로 빚고 직접 가마에서 구워낸 알토란 같은 것들이 세상에 나와 다소 쌀쌀해진 늦가을바람을 난생처음 호흡하고 있었다. 인근의 군수며 서울서 내려온 수집가들까지 적잖은 이들이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곳을 찾은 탓에 여전히 집공사가 진행 중인 주변은 더욱 수선스럽고 분주해 보였다.

 # 본래 내가 기억하는 도공 희뫼는 홀로 고독하게 토막에서 몇 날 며칠이고 머물며 흙을 이겨내 그릇을 빚고 불을 때 작은 각시 같은 화병도 만들고 임 같은 달항아리도 빚어내던 이였다. 물론 그라고 평생 토방에서 새우잠을 자야 할 이유도 없고 대처로 나가 큰 집을 짓고 뜻 맞는 이들과 함께 예술촌을 일군다면 정녕 박수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지친 몸을 토방에 누이고 흙 묻은 발로 간혹 봉창을 걷어차며 뒤척거렸을 그 모습을 더 많이 기억하고 또 사랑하고 싶다. 거기 그의 혼과 기가 더 많이 살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그 토방이 초심(初心)의 산실이요 그의 예술혼의 뿌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까닭에서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희뫼의 작은 백자 화병도 아마 그때 그 시절 그 토막에서 기거할 때 만든 것 아닐까 싶다. 자기 손가락 자국을 작은 백자 화병에 남겨놓으며 혼자 히죽 웃었을 희뫼의 그 장난기와 천진무구함이 거기 스며 있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커질수록, 많아질수록, 팽창할수록 그때 그 시절의 초심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희뫼의 초심 깃든 토방이 그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