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9)|한국의 입장(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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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휴전회담개최와 함께 국군수뇌들이 처한 난처한 입장과 고민을 관계 지휘관들로부터 더 들어보겠다. 이 증언에서 이때까지 묻혀있던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아울러 작금의 사태발전에 비추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값진 교훈도 얻어낼 수 있다.
▲이종찬씨(당시 육군참모총장·소장·예비역 육군중장·현 한국엔지니어링 사장·57) <1951년 7월 5∼6일 께 인데 동경의 유엔 군 총사령부에서 미8군사령부를 통하여 휴전회담대표로 나갈 2명을 한국육군에서 차출해 달라는 전갈이 왔어요. 미군 측은 2명중 1명은 백선엽 장군을 희망한다고 해요. 또 한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를 잘하는 장교면 된다고 하구요.
나는 즉시 백 소장에게 연락하고 또 한사람은 내 보좌관으로 있는 이수영 중령을 지명했어요. 이 중령은 모든 면에서 치밀하고 믿음직할 뿐만 아니라 영어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를 지명한 거지요. 나는 이 중령에게 백 소장을 잘 보좌하고 우리에게 유익한 자료를 수집해서 수시로 우리정부에 알리라고 말했어요. 백 장군은 아마 대통령을 만나 뵙고 문 산으로 간 줄로 압니다.

<북진견제는 휴전협상 전제>
그때 이승만대통령은 서울에 와 있었기에 나는 이기붕 국방장관을 모시고 2명의 대표를 차출하게 된 경위를 보고 드리러 경무대로 갔습니다.
내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이 박사 말씀이 『미군이 공산당과 휴전을 하자는 모양인데 만약 싸우기가 싫어서 그렇게 한다면. 가라 고하게 공산당과 화해하려면 미군이 아닌 내가 북괴의 김가를 만나서 하면 될 것 아닌가』고 몹시 화를 냅디다. 그러면서 대표차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고요.
내 생각으로는 리지웨이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이 되면서부터 한국 휴전을 모색한 것 같아요. 51년 5월에 리지웨이 장군이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목표는 적의 전력파괴에 있지 어떤 지역확보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그리고 적의 춘계공세 실패 후 미군이 우리국군의 북진을 견제한 것도 어떤 휴전협상을 전제한 조치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 같은 미군 측의 의도를 모르고 한국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가려다가 상당한 피해를 본적도 있었어요. 결국 휴전회담이 시작되기 몇 달 전 부 터 미군 측은 정치흥정을 하기 위한 탐색작전을 해왔다고 생각됩니다. 이 무렵에 전반적인 대규모 기동작전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더구나 북으로 밀고 올라가기 위한 전투는 아니었어요. 휴전회담이 개막될 때 이기붕 국방을 모시고 손원일 소장, 김정열 소장과 내가 문 산의 베이스 캠프로 백선엽 대표를 만나러 갔어요.
그때까지 만해도 회담에서 어떤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아니지만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알아보고 또 백 장군을 위로해 주려고 찾아간 거지요. 이때의 문 산행은 정보국장 김종면 준장이 애써서 주선했어요. 우리는 지프로 문 산으로 가면서 북진의 기회를 놓치고 37선과 대동소이한 분단상태에서 휴전을 한다니 피 흘린 보람도 없이 이게 무슨 꼴이냐고 통탄했어요. 우리의 신의를 저버리는 맹 방들의 처사가 미덥지 못한 생각도 들고요.
우리 마음대로 할 힘이 없으니 이게 바로 약소민족의 서러움이구나 하고 모두 울적한 기분으로 문 산에 도착했지요. 회의가 없는 날이어서 백 장군을 문 산의 사과밭 천막에서 만났는데 무척 반가와 합디다.

<백 장군, 책임감으로 고민>
백 장군은 한국 측을 대표했다는 책임감과 회의 주도권을 미군이 쥐고 있는 등의 틈바구니에서 몹시 고민하고 있더군요. 우리는 점심을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나누었어요. 이대통령의 뜻도 분명히 전했고요. 그때 우리정부는 말리크의 휴전제안이 시간을 끌어 그들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려는 술책으로 판단했어요. 그래서 이대통령은 무초 대사에게 휴전회담을 하려면 기한부로 하라는 말까지 했어요. 문 산서 조이 수석대표를 만났을 때 나도 그와 같은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그때 미군의 공군력과 화력이 크게 강화되어 유엔군 측이 아주 유리할 입장에 있었어요. 적은 미군 폭격으로 낮에는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밤에만 병력과 보급을 수송했으니까요.
나는 백 장군에게 육 당 최남선 선생께서 일제 때 쓴 조선역사란 책을 건네주었어요. 이 역사책을 더듬어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요. 그리고 이조시대 인조가 오랑캐에 쫓겨 남한산성에 난을 피했을 때 화친을 주장한 최오길의 고사 얘기도 했고요. 지금과 그때가 정세는 다르지만 화·전의 갈림길에 있는 것은 비슷했으니 깐 요. 그 책은 하늘색 빛깔의 껍데기로 된 것인데 나의 선조께서 무척 아끼던 장서였습니다. 휴전회담 개최로 한국 민과 국군 모두가 큰 시련에 부닥쳤지만 우선 당장은 백 장군 입장이 제일 괴로웠을 거예요. 나는 이수영 중령에게도 국가 이익을 쟁취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하고 문 산을 떠났습니다.

<국가 이익쟁취 결심은 불변>
▲백선엽씨(당시 휴전회담 유엔군 대표·소장·전 육군참모총장·예비역 육군대장·현 충비 사장·51)<7월 10일에 휴전회담 첫 본회의를 열려고 헬리콥터로 개성으로 떠났습니다. 적지인 개성으로 들어갈 때 유엔군 사령부에서 대표들의 신변보호에 몹시 신경을 쓴 게 사실이었습니다. 회의장에는 무장 없이 들어가도록 돼있었어요. 5명의 우리대표는 각자가 조그만 손거울을 한 개 씩 주머니에 넣고 가기로 했어요. 만약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거울을 비쳐 연락키로 한 거지요.
이때 김포에는 우리 회담대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출동태세를 갖춘 구조대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적지를 권총 한 자루 없이 들어가려니, 비장한 생각이 들고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요. 회담장인 내 봉장의 분위기는 극히 살벌했습니다. 수인사도 없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무뚝뚝하게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니까요. 그리고 공산 무장군인을 여기저기 배치해 놓고 일종의 공포분위기를 형성하려는 거였어요. 나는 10일의 첫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이튿날부터는 회의에 불참하겠다는 것을 우리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에게 통고했습니다.
우리정부와 국민은 근본적으로 휴전을 원치 않거니와 첫날 회의 분위기를 보니 대단히 굴욕적이고 한심한 생각이 들데요. 나도 명색이 유엔군 대표의 일원이지만 그에 앞서 한국사람이고 국군지휘관인데 더 이상 그런 회의에 못나가겠더군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대표로서의 내 입장이 엉거주춤한 것도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어요. 대통령께서는 그냥, 구두로 잘해 보라고만 했는데 자칫하다가는 우리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물론 미군 측은 나를 신임하고 대표로 지명했으니 이점을 십분 이용해서 우리국가 이익을 최대한으로 쟁취해야겠다는 결심에도 변함은 없었고요. 조이 제독은 즉시 동경의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전화로 내가 회의 참석을 거부한다는 보고와 함께 해결책을 의논한 모양입니다.

<신임장 받고 자신 되찾아>
리지웨이 장군이 문 산에 비래해서 나를 부르더니 잘 협조해 달라면서 대통령께 말씀드려 서면으로 된 신임장도 얻도록 하겠다고 하데요. 7월 13일에 이기붕 국방장관이 이대통령의 서명이 있는 신임장을 가지고 문 산으로 왔어요. 여기서 나는 어느 정도 자신을 되찾았어요. 내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회의장에서 싸우는 것이라는 각오를 새롭게 한 거지요. 그래서 다음날부터 또 회담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회의장에 출발하기에 앞서 유엔군 대표 5명은 미리 전략회의를 열었어요.
그날 토의될 의제에 대해 우리측의 의견을 미리 조정하는 회의지요. 내가 우리 한국 측의 입장을 주장할 수 있는 곳은 이 회의였습니다. 그리고 조이 수석대표와 리지웨이 사령관과도 여러 번 막후접촉을 했고요. 휴전회담은 7월 25일쯤에 가서야 겨우 의제에 합의를 보고, 그 다음부터는 군사분계선 구획문제토의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에피소드나 고충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토의 때는 공산술책이나 한국지리에 밝지 못한 미군 측과 나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많았어요. 이 내막 이야기는 요다음에 밝힐까 합니다.

<주요일지> (1951년 7월25·26·27일)
※7월 25일▲전전선서 적 저항치열▲개성회담 제9차 회의▲공산 측 기자에 영 기자 2명 출현▲브래들리 합참본부의장 2년 유임발표.
※7월 26일▲금성지구의 적 움직임 활 발▲개성회담 제10차 회의 의제합의▲평양방송, 철병 문제 토의 필요 강조▲트루먼, 휴전회담 진전에 희망 있다고 기자회견▲애치슨 국무는 적의 새 공세 경계 언명▲영 정부도 휴전회담에서의 의제합의에 만족.
※7월 27일▲11차 휴전회담, 군사분계선 토의개시▲국회, 국민의료법안통과▲거창 사건 군재 개정▲마샬 국방, 유럽 주둔 미군증강 계획 발표, 명년 말까지 47만.
※알림=민족의 증언 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11 (교환)의 74번, 야간과일요일은(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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