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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눈길의 여수|정연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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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겨울을 견디는 척도>
북국의 눈은 벼르는 일도 없이 잘도 내린다.
걷다가도 눈이요 앉았다가도 눈이다.
아침에 맑았던가 싶으면 어느 사이에 구름이 얽혀 눈으로 풀리고 이제쯤 그쳤는가 잠자리에 들면 이 북국의 밤은 나그네를 잠재워 놓고 밤새도록 마음놓고 눈을 내려 밝은 날의 아침 길을 지워버린다.
북해도의 눈은 그 고장 사람들이 겨울을 견디는 힘의 척도다. 눈도 억척스레 내리지만 그 눈을 다루는 손길도 억척스럽다.
갖가지 제설 기구로 눈만보면 눈치기다. 아니 눈이 내리는 것과 경주나 하듯이 내려 쌓이는 눈을 열심히 밀어 제치고 길을 닦는다. 게을르다가는 작업량이 몇 배로 늘어나게 마련이니까 조금치도 방심을 할 수 없는 것이 눈 나라 사람들의 겨울생활.
온갖 초목은 눈 속에 잠들고 그 기나긴 겨울 잠 속에서 봄을 향한 꿈이 영근다.
그날 밤 온 세상이 눈송이로 풀려 하늘도 땅도 함박눈발에 휘말려들던 시간에 「삽보로」의 시가지를 걷고 있었다.
불빛만 몽롱할 뿐 「빌딩」도, 「아스팔트」도 없었다. 사물의 형체는 눈발에 묻혀 하얗게 지워지고 사람들은 그럭저럭 하얀 공중을 둥둥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하얗게 풀려내리고 발 밑의 눈이 치쌓이니 땅위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랑스러운 설령.
그 차가운 하얀 눈이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생의 환희가 뜨겁게 닳아 오르는 설령이 되어 헤매지 않을 수 없었다.
몽환의 거리였다.
현실같은 것은 조금도 아깝잖게 한데뭉쳐 깨끗이 던져버릴 수 있는…
아무 것도 명료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렇게 천지가 하얀 눈발 속에서 감미롭게 흔들리고 있는데 생활의 구획 같은 것이 왜 있어야 하는가.

<눈만 뜨면 제설작업>
따뜻한 등황색 불빛이 꿈꾸는 골목에서 「스페인」 주장이라 이름한 술집을 발견하고 입구에서 눈을 털었다. 몸을 한 번 흔드니 우수수 흩어져 내리는 눈더미.
「베치카」앞에서 젖은 장갑을 말리며 「보드카」를 마시려니까 문득 가슴에 괴어드는 물기. 그 물기를 찍어 남모르는 낙서를 하듯 머언 눈으로 독백하던 맛. 문밖에서 그토록 쏟아지던 눈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그토록 진한 인생의 여수로 남겨질 수 없었으리라.
그런 속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일본 젊은이들. 사내녀석의 어깨를 덮어버린 치렁치렁한 머리가 아니면 조금 사양했다는 것이 단발머리. 「퍼머넨트」 까지 굳이 치르고 옷 모양도 다채롭다. 주장의 「호스트」들은 그런 차림새에다 흰 앞치마를 둘렀다.

<밀어닥친 서구풍물>
현대화에 뒤질까보냐고 있는 대로 머리악을 쓴 「삽보로」는 「리틀·도오꾜」. 도시구획은 어느 곳보다도 정연하고 번화가 뒷길에는 온갖 유흥이 열을 올린다.
제법 어색 잖은 서구풍도 깃들여 있어서 「바」·「레스트랑」·맥줏집·찻집 등 재미있고 때 벗은 집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하나가 찻집「불란서 시장」. 눈길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따뜻하여 문을 밀고 들어서니 이구석 저구석에서 고물 유령이 걸어 나올 듯 갖가지 고물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케케묵은 헌 괘종, 녹이 슨 종, 낡아빠진「실크·해트」, 고물 전화기, 숯 다리미, 서양 소쿠리, 얽어빠진 유성기, 세상 풍파를 있는 대로 겪었을 「트렁크」·「램프」 등 잘도 갖추갖추 몰아다 놓은 고물들이 고색도 창연하게 빛나고 있었고 의외로 아늘한 조화를 이루었다. 불란서 시장은 찻집과 함께 고물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곳의 「웨이터」들도 열의 그 긴머리와 앞치마가 여일했다. 서양을 잘들도 고스란히 닮아서 「코피」맛은 일미. 입안에서 남은 「코피」향기를 음미하며 거리로 나서니 여전히 함박눈.
큰 길 한복판으로 눈더미가 둥실둥실 지나가기에 무엇인가 했더니 승용차다. 어디엔가 주차를 했다가 눈을 털기가 귀찮아서 그냥 몰고 나온 듯 운전석 앞의 유리창만 「윈도·와이퍼」가 빠끔하게 유리를 틔워주었을 뿐 그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눈더미의 이동 같았다. 설국의 애교로 한동안 미소에 짓게 했던 풍경이다.

<국도엔 눈더미 질주>
그리고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던 것은 「삽보로」시가지 한옆을 흐르는 창성천의 다리 위.
꿈틀꿈틀 몸을 뒤채며 내닫는 개울물 위에 눈송이의 젖은 꽃잎이 흘러라. 여울물에 내려앉은 눈송이의 젖은 꽃잎이 한에 절어 멍든 빛 처럼 개울물 가득히 멍울멍울 흘러가던 눈으로 얽힌 젖은 꽃잎
한밤중 대중없이 눈 소식이 궁금하여 겨울잠을 헤치고 창가에 몰래 서니 그 어지럽도록 화려하게 흰 눈을 쏟아 내던 북국의 밤 하늘이 의연 침묵하고 있는데….
그 진한 어둠의 낙화 던가. 밤의 한구석을 가만히 무너뜨리며 하얀 신열을 허공에 남긴 것은….
밤이 영글다 못해 하얀 목화로 피어 올랐는가 아 그것은 숨 죽인 목피 위에 머물렀던 눈 더미.
어둠이 영글어 묵은 껍질을 깨어내고 새살이 하얗게 빛나려는가. 아, 그것은 꿈꾸는 나뭇가지의 뒷챔으로 어둠을 흔들면서 흩어지던 설령.
겨울 나뭇가지에 조심스레 쌓였던 눈은 북국의 어둠에다 신선한 상처를 남기며 푸슬푸슬 무너져 내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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