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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공과의 대화 2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소와 더불어 20년을 살았다. 소가 웃으리마는 소와 함께 울고 웃으며 20년을 쇠똥냄새를 맡고 산 박문규씨(39)는 소를 누구보다 좋아한다. 직업은 충남 금산읍 소 시장 관리인.
금산읍 신대리에서 1㎞쯤 떨어진 곳의 소 시장이 바로 그의 직장이다.
1천7백 평 가량의 마당에 4백여 마리의 소 떼가 우글거린다. 닷새 걸러 한번 씩 서는 장날이면 멀리 수원·영동·무주 등지에서까지 새 주인을 찾아 소들이 끌려온다. 장날이 되면 박씨의 일손은 아침부터 바쁘다. 쇠똥이 떨어져 금새 오물 투성이가 될 줄 뻔히 알지만 박씨는 아침 일직 장바닥을 쓸어둔다. 그리고는 배고픈 소를 위해 마른풀을 준비하고 아침식사를 부산히 해치운다.
아침 8시. 방울소리를 울리며 빨간 댕기까지 단 소가 주인한테 고삐를 잡힌 채 장터거리에 들어선다. 10시쯤 되면 이내 소시장안엔 소들이 꽉 들이찬다. 박씨는 소를 보면 마치 사람 얼굴을 구별하듯 생김새를 분간해낸다. 소 시장을 꽉 메운 소 떼를 보면 마음이 흐뭇하지만 해질 무렵 소들이 새 주인을 따라 뿔뿔이 흩어질 땐 맥이 탁 풀리고 허전한 느낌이란다. 더구나 정든 소를 도살장에 팔아 넘긴 주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멍청히 서있는 모습을 볼 때엔 가슴이 메어진다고 했다.
박씨는 낮에 소들과 함께 눈빛으로 주고받은 많은 사연들을 되살려 밤이 되면 또박또박 소와의 대화를 일기로 옮겼다. 2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 그가 쓴 일기장 이름은 우덕집. 무려 24책 77호의 장편.
일기내용은 거의가 말없는 소를 통해 가슴에 울려온 것을 글로 표현, 소의 인종(인종)과 어지러운 사회상을 비교한 것이었다. 박씨는 이 일기장이야말로 6남매에게 남겨줄 유일한 유산으로 소중히 여기고있다. 51년 금산농고를 졸업한 박씨는 대학진학을 중단하고 고향인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에다 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전란 때문에 학교유지가 어렵게되자 52년1월 군에 입대, 제주에서 훈련을 받다 교통사고를 당해 1년 동안 병상에 누워지내다 군을 나왔다.
그때 박씨 나이는 19세. 논8백 평으로 4식구가 살아야했다. 더구나 군에서 다친 오른쪽 다리가 말끔히 낫지 않아 농사일을 포기하고 소 시장 관리인으로 나섰다. 이때는 2백 평 장바닥에 고작 50여 마리의 소가 거래됐을 뿐이었다.
53년4월l2일자 일기 1「페이지」를 펼쳐보면 『10마리 이상의 소가 매매됐을 땐 중개인들이 박씨의 어깨를 툭툭 치며 관리비 몇 푼씩을 던져줬다. 그러나 팔려 가는 송아지의 울음소리가 애처로와 아예 거래가 없는 편이 나았다』라고 씌어있다. 또 어떤 날 일기장의 첫머리엔 『음매애… 어미 소를 부르며 송아지는 발을 구르지만 우악스런 농부는 어린 송아지를 사정없이 끌어간다. 세상은 잔인하지 않곤 살기 어렵다는데…』라고 스스로를 모질게 매질하기도 했다. 박씨가 소 시장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황소들이 무서워 근처에 갈 엄두도 못 냈다.
소몰이꾼들이 함부로 다뤄도 묵묵히 따르는 소에게서 차차 무한한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박씨는 추운 겨울날 바람막이도 없이 온종일 떨고 서있는 소를 보면 그지없이 안타까웠다.
비를 철철 맞으면서도 눈만 껌벅거리는 소의 모습은 차마 쳐다볼 수 없단다. 『도살장 문 앞에 매인 소가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원망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볼 땐 가슴이 철렁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고 박씨는 말했다.
소장수들 사이에 소 형제라는 별명까지 얻은 박씨는 『내 손을 거쳐간 소는 약5만 마리는 될 것이다』고 일기장을 뒤적인다.
9년엔 폐결핵에 걸려 몸져누웠다가 1년 내 논 개구리 복용으로 회복했는데 이것도 소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끈기 있게 개구리를 구해 먹었던 덕이라는 것.
60년엔 고향인 남이면에서 민주당후보로 면장에 입후보, 28세의 어린 나이로 연상의 김 모씨에게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황소처럼 밀고 나갔더라면 당선됐을 텐데…』라고 웃었다.
박씨는 혈화집이란 시집도 내었다. 틈틈이 쓴 시가 모두 13권 4백20편이나 되는데 처음엔 붓으로 한시를 쓰다 최근엔 현대시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시집출판계획까지 짜놓고 있다.
소에게 휴머니스트인 그는 덩치 큰 소의 발에 신긴 덧신이 해졌을 땐 손수 신발을 짜서 신겨준단다. 한여름 뙤약볕에 서있는 소에게 물을 퍼다줬을 때 꿀꺽꿀꺽 단숨에 물통을 말리는 모습을 쳐다볼 때가 가장 후련한 순간이었다는 박씨의 말이었다. 20년 간 소 시장을 관리하면서 가장 쓰라린 일은 송아지를 데리고 나온 어미 소가 도살장에 팔려갈 때였다고 했다. 이런 날은 으례 모성애나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수필을 써왔단다. 박씨는 육식을 않는다. 언제부턴지 기억이 아물거릴 만큼 오래 전에 쇠고기를 끊었는데 이번 구정 때도 젯상에 쇠고기 대신 생선을 올렸다.<대전=박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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