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5)-개성의 함정(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유엔」군 측 수석대표 「C·터더·조이」제독은 7월10일 오전의 제1차 본회의에서 쌍방의 개회사가 끝난 후, 해결해야할 첫 의제는 우선 토의를 한국과 군사문제에만 국한시키기로 하고 이런 합의사항에 먼저 서명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남일은 이 회의는 한국에서의 전투를 종결하는 조치부터 마련해야 하는데 토의를 한국과 군사문제에만 국한시킨다는 쌍방의 합의가 왜 그렇게 필요한 중대한 전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일의 이런 태도는 회담범위를 군사문제이외까지 넓히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이것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①한국 전종결의 기본조건으로서 38선에 따라 양측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설정할 것.
②모든 외국군은 한국으로부터 철수할 것.
③한국에서의 정전과 휴전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것.
④휴전에 따르는 보도에 관계된 조치.
「조이」제독은 우선 처리해야할 문제는 의제의 결정이라고 말하면서 다음의 9개 항목을 제시했다.
ⓛ의제의 채택 ②국제적십자대표가 포로수용소를 시찰할 경우, 그들에게 부여될 권한과 자격문제, 그리고 수용소의 위치 ③휴전본회의나 그 밖의 분과위회의에서는 순전히 한국의 군사문제만을 다룰 것 ④한국에서 전투나 군사행동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과 조건아래 현 전투행위를 종결할 것 ⑤비무장지대 설치에 관한 합의 ⑥군사휴전위원회의 구성과 권한 및 기능문제 ⑦군사휴전위원회 직속의 군사 감시분위는 한국내의 감시조사를 하는데 합의할 것 ⑧군사 감시분위의 구성과 기능 ⑨포로에 관한 조치.
「조이」제독은 미리 준비한 이 제의의 사본을 남일에게 수교하고 공산 측 제의의 부본도 달라고 요청했다. 남일은 사본준비에 필요하다고 3시간35분간의 휴회를 요청했는데 아마 이기간에 「유엔」군 측 제의를 검토하고 평양에서의 어떤 지시를 얻으려는 눈치였다.
오후에 회의가 재개됐을 때 회의장안에는 오전에는 없었던 것이 눈에 띄었다. 「유엔」군 대표들은 회담을 개시할 때 규준에 따라 2척 높이의 「유엔」기를 가지고 와서 꽂아 놓았었다.
오전 중에 공산기는 없었는데 오후회의에는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런데 공산기는 「유엔」기보다 크고 받침대도 넓은 것이었다. 오후회의가 개막되어 남일이가 그들 제의 부본을 조이 제독에 수료할 때 공산 측 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댔다.
두말할 것도 없이 높은 공산깃발을 배경으로 남일이가 「조이」제독과 대하고있는 것을 선전에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조이 제독은 공산기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사전에 쌍방의 합의를 얻을 성질의 것이라고 항의하고 20명의 「유엔」군 측 기자들의 개성출입을 허용하라고 제안했다. 조이 제독은 쌍방기자들은 회의장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다만 회의장부근만 출입시키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남일은 처음에는 이미 자기 측 기자들이 첫날부터 와있기 때문에 조이 제안을 수락하는 듯하더니 이내 곧 상부의 허가를 얻어야한다는 구실로 그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7윌10일의 제1차 본 회의는 아무 소득 없이 「유엔」군 측 대표가 수모만 당한 채 끝나고 말았다. 「유엔」군 측 기자출입문제는 14일에야 결말이 났는데 그 경위는 이러했다.
7월11일의 제2차 본 회의 조이 제독은 「유엔」군 측 기자들의 회의장 출입중요성을 강조하는 「리지웨이」장군의 각서를 낭독하고 『만약 내일 아침까지도 「유엔」기자들이 회의장에 접근할 수 없다면 내일오전7시30분까지 우리 기자들도 동행한 회담재개가 언제 가능한가를 통고해달라고 말했다.

<1차 회담 아무 소득 없이>
7월12일에 20명의 기자를 태운 차량이 개성을 향해 올라갔으나 공산군 초소의 제지를 받고 문산으로 되돌아왔다. 「조이」제독은 이 사실을 즉시 남일에게 항의했다.
공산측은 「유엔」군 대표차량을 제지한 게 아니고 기자들만 막았는데 이 문제는 현 단계의 회의가 아직 순 군사적인 것이고 의제조차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결이 지연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리지웨이」총사령관은 공산지배지역에서 회담을 개최하기 때문에 여러 난관에 부닥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보냈다.
『회담을 개성이 아니고 우리가 처음 제안한 것처럼 「덴마크」병원선에서 개최했더라면 완전히 중립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어느 쪽도 무장군인의 위협 같은 것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제1차 본 회의 때부터 공산대표들은 우리대표행동에 제한을 가했다. 무장경비병을 우리대표단 가까이 배치했고 대표단차량통과도 지연시켰다.
또한 쌍방이 합의를 본 문산과 회의장사이의 우리 통신설치문제에 대한 협조도 보류하고 있다. 그리고 회의장지역의 우리대표단의 일부 인원(주=기자들을 뜻함) 출입도 거부하였다.
적당한 면적의 합의된 회답장소를 설치하고, 이 장소에는 무장병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고, 쌍방대표들이 호혜적인 행동의 자유를 갖게 해야한다. 그리고 신문기자를 포함한 대표단의 구성도 쌍방이 똑같이 동등한 자유를 가져야한다.』

<지연술 써 선전에 이용>
「리지웨이」총사령관은 결론에 가서 공산측이 대표들의 안전이나 그 밖의 이유로 계속 제한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회의장소를 본인이 앞서 열거한 단순한 보장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제안했다.
이 메시지를 받은 김일성과 팽덕회는 7월14일에 개성을 중립지대로 하고 20명의 「유엔」군 측 기자들의 회의장 출입에도 동의한다고 회보해 왔다. 이래서 「유엔」군 측 기자들의 출입문제는 비로소 해결되었다.
이 문제로 3일 동안 중단됐던 본회의는 15일에 제3차 회의를 열었다. 14일부터는 20명의 「유엔」군 측 기자들도 대표들과 동행해서 개성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취재경쟁에 뒤진 유엔 측>
그러나 이미 이때는 벌써 공산측 기자들이 회담 초일부터 찍은 문제의 「유엔」대표단차량의 백기사진이 공산측 간행물에 크게 보도된 후였다. 이렇게 휴전회담취재경쟁에서도 「유엔」군 측은 공산측보다 4일이나 뒤진 셈이었다.
한편 당시의 「유엔」군 측 대표의 일원이었던 「아레이·A·버그」제독(현 「조지타운」대학전략연구소장)은 개성회담의 교훈을 1968년 2월호의 「리더즈·다이제스트」지에 기고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의 위험」(The Hazards of Negotiating With The Communists)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있다.(주=「버그」제독은 포항의 미 육군기념농장 관리인 이종만씨를 통해 자기 글이 본 연재에 인용되는 것을 기꺼이 승낙한다고 알려왔다.)<우리 5명의 「유엔」군 측 대표는 개성에서 「헬」기로부터 내려 그들이 대기해놓은 「지프」에 올라탔다.
내가 탄 차에는 「루시」라는 이름이 페인트로 그려있는데 앞 유리창에는 총구멍이 나있고 쉬트에는 뻘건 핏자국이 보였다. 지프들은 모두 미군한테서 노획한 것이었다.
차마다 백기를 달고 길 양쪽에 여기저기 서있는 무장공산군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으며 회의장으로 달렸다.
공산 카메라맨들은 이 광경을 모두 촬영하고 있었다. 수백만의 아시아인이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진을 보고 정말 미국이 항복하러 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첫 교훈을 배웠다. 즉 공산주의자들과 평화를 협상할 때에는 반드시 중립지대에서 만나야한다는 것이다.
「닉슨」행정부는 공산월맹에 『언제 어디서』라도 만나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놀랄만한 실책이었다. 실제로 「파리」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공산주의자들은 전 세계를 향하여 미국은 거짓말장이라는 선전을 늘어놓았으니까 말이다. 1951년의 개성회담 때는 그 이전에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휴전협상을 한 경험이 없으니까 그때 저지른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순진하게도 북괴나 중공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의껏 협상하리라 생각했었다.
우리가 이제 「하노이」와 다시 협상하는 마당에 한국휴전회담의 교훈을 되새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아다시피 그때 「리지웨이」사령관은 회담장소로 누가 보아도 합당한 「덴마크」병원선을 제의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개성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한국전쟁만을 종결지을 수 있다면 어디서 회담한들 어떻겠느냐는 생각에서 적이 지배하고 있는 개성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정치·도의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유엔」군 측이 양보했으며 더 세게나오면 더 양보하리라고 공산측이 판단하고 있음을 곧 알게되었다.

<의제 정하는데 회의 10회>
우리는 개성에서 받은 수모에 대해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공산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회담에서 그들은 선전점수를 따기 위해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가지고도 무기한 지연전술을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처음 회담을 시작할 때 기껏 한 달이면 쌍방이 휴전에 필요한 조건에 합의를 보고 평화협정이 조인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의의제를 결정하는데도 16일 동안에 10회의 본 회의를 열고 맹렬한 입씨름을 해야했다. 그 다음부터는 휴전회담은 진짜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주요일지(1951년7월 13·14·15일)
※7윌13일 ▲적, 금성서 맹렬한 반격 ▲적기 2대, 문산에 내습 ▲공산 측, 「유엔」측 기자들의 개성출입 계속 거부 ▲국군수뇌, 문산서 「리지웨이」와 요담 ▲「리지웨이」장군, 개성의 중립화요구 ▲「애치슨」국무, 「리지웨이」제안을 전적으로 지지 언명
※714U일 ▲공산 측, 「리지웨이」제안 수락 ▲이 공보처장, 적의 휴전제안은 사기라고 언명 ▲북괴기관지, 외국군철수요구 ▲소련, 영문지 「뉴스위크」의 국내판매 허용
※7월15일 ▲개성남방의 중립지대서 중대병력의 적 발견 ▲미 10군단장, 「아먼드」후임에 「크리바스·바야스」소장 임명 ▲개성회담재개 ▲미 정부, 한국의 휴전반대 「데모」우려설 ▲「프라우다」지, 미의 대일 강화조약 초안 비난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