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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제자는 필자|<제26화>경식대 사계(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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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돈암장 시절㉰>
이 박사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를 경계했지만 초기에는 하지의 권고 때문에 좌우합작을 해보려고 했다.
박헌영과 몽양(여운형)도 만나고 설산을 내세워 좌파와 합작협상을 시켰다. 공산당 쪽에서는 이여성·김철수가 대표로 주로 밤에 돈암장에 와 이 박사를 만나곤 했다.
좌우합작은 처음부터 될 리가 없었던 것이지만 더우기 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표변한 것이 결렬을 재촉했다.
1월14일 이 박사는 『공산당은 소련을 조국으로 하는 자들이니 너희의 조국으로 가라』는 요지의 강경 성명을 냈다.
그때는 성명을 원지에 골필로 써 프린트해서 신문사로 돌리던 때다. 이 성명도 유인해 신문사에 보냈는데 영어번역이 늦어 하지 사령관이 받을 때는 이미 신문이 나오는 시간이었다. 하지가 노발대발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공산당도 『당신은 미국에 금발벽안의 미인이 기다리니 미국으로 가라』 『돈암장은 돈 많은 친일파의 소굴』이라는 성명을 싣고 비라를 뿌렸다.
비라에는 친일파를 지목한 사람의 이름까지 지적했는데 몇몇은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바깥채에 있던 젊은 비서들이 나를 불러 이 비라를 들이대며 『그런 사람들 못 다니도록 건의하라』고 요구해왔다.
그때도 이 박사는 국내신문을 거의 보지 않았었는데 이 사실만은 알려 드려야겠기에 몰래 밥상 들여가는 애를 시켜 슬쩍 떨어뜨리도록 했다.
이 박사는 비라와 건의문을 읽은 뒤 나를 불러 『이런 것 있으면 꼭 가져와. 내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해』하면서 거기에 적힌 사람에 대해 일제 때 행적을 소상하게 물었다.
문제가 된 사람은 신용욱 등 몇 한민당 간부와 실업인 몇 명이었다. 동산을 불러 『그 사람을 왜 끌어들였어. 앞으로는 다니지 말라고 해』하며 야단을 쳐, 동산이 비서들에게 『누가 그런 건 갖다 드렸느냐』고 큰 책망을 한 일이 있다.
이때쯤부터 이 박사는 폐렴으로 한동안 병상에 누웠다. 임영신씨와 동산부인이 간호를 했지만 부인이 만리타향에 있어 쓸쓸한 병상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지가 이 박사를 찾아온 것도 이때였다. 두 사람의 정치적 구상이 이견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아직 정면 충돌까지는 가지 않았었다.
이 박사는 2월초부터 백범과 합작하여 비상 국민회를 만들고 최고 정무위원 28명을 선정했다. 이것이 하지의 권유로 2월14일에 발족한 민주의원의 모체가 된다. 다만 정무위원에 들어있던 몽양이 이 박사의 기피로 의원에선 빠지고 김활란씨가 들어갔을 뿐이다.
민주의원에서 이 박사는 의장이 됐고, 김규식 박사가 부의장으로, 백범 선생은 앞으로 미군정의 행정적 자문에 응할 각부를 통할하는 총리로 내정됐다.
해가 바뀌고 몸이 좋지 않던 이 박사가 3월 중순 다시 감기가 심해져 병석에 눕자 측근에서는 군정청을 통해 프란체스카 부인의 귀국을 서둘렀다.
미·소 공동위가 시작되고 민주의원 의장직 사표를 낸지 닷새만인 3월25일, 이 박사는 동산부처의 안내로 하지의 특별정치고문 굿펠로 대령의 방문을 받았다. 굿펠로 대령은 미군정에서 유일한 이 박사 지지자였다.
굿펠로가 이 박사에게 드라이브를 권하자 동산부인은 갈아입을 새 한복을 내놓았다.
차가 김포가도로 접어든 뒤 동산은 프란체스카 부인이 도착한다고 보고했다.
이 박사는 소년처럼 기뻐했다. 일행이 김포공항에서 기다린 지 반시간만에 검은 오버를 입은 벽안의 40대 여인이 트랩을 내렸다.
『오, 마미.』
『오, 파파.』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구먼.』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왜 지팡이는 짚고 계시지요.』
『좀 아팠소.』
『오, 가엾어라. 마미도 없이 얼마나 괴로우셨어요.』
두 부부는 영어로 반년만의 해후에 어쩔 줄 몰라했다.
다음날은 3월26일로 이 박사의 71회 생신 겸 프란체스카 부인 환영파티를 베풀었다. 음력으로 2월1일이 생신인 이 박사가 양력 3월26일을 생신으로 정한 게 이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프란체스카 부인이 온 뒤로는 하루 여섯번씩 하던 식사를 3회로 줄여 조반은 토스트 정도로, 점심은 양식으로, 저녁은 한식으로 하고 샛밥을 없애니 이박사의 건강이 다시 좋아졌다.
그땐 2월말에 몽양과 가깝던 하지의 정치고문 랭든과 전속부관 버치 중위를 추방하려다 발각이 돼 동산은 하지의 압력으로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민주의원 사무처장으로 가 있었다. 동산부인도 돈암장의 주부가 온 뒤로는 돈암장을 떠났고 임영신씨의 출입도 뜸해졌다.
이런 공백기를 이용해 우리말을 몰라 외로운 프란체스카 여사 주변에 만송의 부인 박마리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박마리아는 부인에게 첫인사를 하면서 한복을 해왔고 이 한복을 입은 「프」여사가 이 박사의 찬사를 받는 통에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돈암장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두번이나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던 사실이다.
경비경찰 중의 공산당 푸락치가 비서실 부엌에 시한폭탄 장치를 했다가 발각된 것과 돈화문 부근에서의 저격사건이다.
전 국악원 건물에 있던 민족통일 총본부에 가던 길에 뒤에서 저격을 당해 자동차의 뒤 유리창 바로 위, 아래와 밤바 등 세 곳에 총탄을 맞았다. 구 황실에서 쓰던 튼튼한 차여서 총알이 차체를 뚫지 못해 다행이었다.
저격사건이 있은 뒤 곧 돈암장에 돌아온 이 박사는 『나 오늘 총 맞아 죽을 뻔했어』하고 태연해했지만 그 말을 듣던 모두가 울먹였던 기억이 난다.
후에 범인을 잡아 현장검증을 할 때 『돈암장 담을 넘어오니 이 박사 부부가 연못에서 고기밥을 주고 있길래 뛰어가 쏠까했으나 그러면 도망을 할수 없을 것 같아 계획을 바뀌었다』던 진술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계속>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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