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내사랑 순정만화 몽땅 모였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온갖 역경과 주변의 질시.오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이루어진 '백마를 탄 왕자'와의 멋진 사랑…. 많은 소녀들은 한번쯤 순정만화 속 주인공을 꿈꾼다. 만화를 읽으며 밤을 지새우는 소녀와 한때 그런 소녀였던 이들을 위한 전시회가 열린다.

7일부터 4월 6일까지 서울 남산 자락의 '만화의 집'에서 열리는 '여성만화작가 기획전'이다. 한국여성만화인협의회(이하 여만협.회장 신일숙)와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공동으로 마련했다.

순정만화에서 시작한 여성만화가 오늘날 얼마나 다양한 세계를, 얼마나 감동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는 자리다.

'리니지''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신일숙, '북해의 별''비천무'의 김혜린, '라비헴 폴리스''별빛 속에'의 강경옥 씨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성만화가 64명이 참가한다. 1백30여명의 여만협 회원 중 절반 가까이 가 참가하는 큰 잔치다.

신일숙 회장은 "1998년 이후 매년 소규모로 열리다 지난 2년간은 행사를 하지 못했다"며 "올해는 신인만화가들의 참가를 독려, 그들의 작품을 많이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순정만화의 어제와 오늘=순정만화의 뿌리는 가족만화다. 1950년대 후반부터 봉선이 시리즈의 권영섭을 비롯, 김종래.박기정.박기준 등이 가족을 소재로한 만화로 인기를 모았다.

60년대부터 스타 여성작가가 출현했다. 엄희자.민애니 등은 화려한 장식머리에 커다란 눈을 지닌 주인공들이 끝내 고난을 이겨내고 행복을 찾는다는 이야기로 큰 인기를 누렸다.

70년대 들어 강화된 검열로 생긴 한국 만화의 빈틈을 일본의 대작 만화들이 채우기 시작한다. 정체불명의 작가 이름으로 나온 '유리의 성''베르사이유의 장미''캔디캔디'등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한국의 순정만화는 부활한다. '이오니아의 푸른 별''야누스데이'등에서 일본만화 못지 않은 장엄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황미나를 비롯해 '별의 초상'의 김진, '라이온의 왕녀'의 신일숙 등 역량있는 작가들이 속속 등장한 것이다.

90년대 이후 다양한 잡지 공모전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보다 많은 작가들이 등장한다. 특히 자신만의 양식을 찾는 작가들이 순정만화의 지평을 넓혔다. 동화적 만화를 지향하는 이향우, 일러스트만을 고집하는 권신아, 인터넷의 강점을 활용하는 권윤주, 실험적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최인선 등이 대표적이다.

순정만화의 의의=만화평론가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한국의 순정만화에 대해 "히트한 작품을 베끼는 데 머물지 않고 스스로 진보하며 발전해왔다"고 평가한다.

그는 순정만화가 한국 만화사에 끼친 영향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빌려보던 만화를 사 보는 만화로 만들었다는 점을 든다. 예쁜 그림을 갖고 싶은 소녀들이 만화책을 '사기'시작했고 이로 인해 80년대 후반 전문잡지가 속속 등장했다는 것이다. 잡지의 부흥은 공모전의 활성화로 이어졌고 유시진.천계영.심혜진 등 공모전 출신 작가가 주류로 등장했다.

둘째는 내용의 풍부함이다. 초기의 순정만화는 멋진 남녀의 로맨스가 주축을 이뤘지만 최근 들어서는 여성의 정체성 모색, 일상의 탐구, 독특한 환상의 세계 구현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셋째는 게임과의 결합이다. 신일숙의 '리니지', 김진의 '바람의 나라'등은 온라인 게임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 특유의 뚜렷한 캐릭터와 섬세한 이야기, 장대한 작품 스케일은 게임에서도 빛을 발했다. 신일숙씨는 '리니지'의 성공원인에 대해 '혈맹'이라는 작품 속 구조를 든다. "자신이 속한 혈맹 아래 모두 하나가 되는 구조는 게임 유저들에게 강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부여했다"는 얘기다.

넷째는 동호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직접 그림도 그리던 적극적인 독자들은 PC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든든한 지원세력이 됐다. 작가와 독자의 튼실한 연대야말로 한국 순정만화만이 가진 힘이라는 것이 박교수의 분석이다.

전시회 즐기기=만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만화가들과 만화 속 주인공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됐다.

원화 일러스트 외에 작가가 직접 만든 작품 속 캐릭터 인형이나 도자기 등이 함께 전시된다.

매주 토요일에는 작가 사인회도 열린다. 8일에는 하시현.카라, 15일에는 신일숙.김세영.백혜경, 22일에는 김나경.김대원.강경옥, 29일에는 김혜린.신일숙.나예리 씨가 나온다. 한정 수량으로 제작된 전시회 포스터도 선착순 배포된다. 전시회장 아래층에 있는 자료실에선 2만여권의 만화책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정형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