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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제자는 필자>|<제25화> 「카페」시절 (14)|이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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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색주가의 등장>
「카페」가 한창 풍성할 무렵, 뒷골목 납작 기와집에 색주가라는게 등장했다. 말하자면 순 우리 나라식 「카페」였다. 전에 없던 새로운 이름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색과 주를 아울러 파는 집이다.
「카페」와 다른 것은 순 한국 집에서 안방 건넌방 아랫방 뒷방에다가 술석을 마련하고 손님이 찾아오면 어여쁜 아가씨가 술상을 들고 들어가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국식인 것이 특색이다.
여자들의 이름도 제법 기생같이 명월이니 산옥 등등 차림새도 머리는 곱게 촉지고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 동백기름 냄새가 제법 은근하다.
색주가라는게 「카페」 못지 않게 성시를 이루었으니 여기서는 술 취한 손님을 재워도 보내고 「카페」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니 「카페」 같은데는 얼씬도 못하는 젊은이들이 찾아들었다. 여기서 한마디 해 둘 것은 일인들의 심보다. 배일 하는 행동이 아니면 그냥 버려 두고 모르는체 했다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이 술 마시고 노는데는 지극히 관대하여 색주가라는 난잡한 술집이 판을 치고 장사를 해도 그냥 버려 두었으니 말이다.
이래서 서울에서 색주가라는 우리식 「카페」 가 한창 재미를 보았다.
반드시 장명등이 켜 있고 그 장명등이 불야성을 이루는 지역이 있었으니 단성사 뒷골목(묘동·봉익동·훈정동)과 그 건너편 (돈의동·낙원동) 뒷골목은 밤만 되면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날이 새기까지 끊일 줄 몰랐다. 역시 장판 방에서 한복 입은 아가씨가 따르는 술이 비위에 맞았던가 보다.
서울역 건너편 한진고속 뒷골목 일대는 순화동·봉래동이지만 이 근처에는 좀더 맹렬한 「서비스」를 결사적으로 감행하는 색주가가 들어차 부근에 사는 사람들의 자녀 교육에 많은 걱정을 끼쳤건만 일인들은 모르는체 내버려 두었다.
요사이도 그 뿌리가 남아서 이 근처는 고속 「버스」에서 내리는 촌 손님들이 대낮에도 곧잘 걸려든다. 어쩌자고 그냥 버려 두는지 모를 일이다.
돈냥이나 있는 친구들은 어쩐지 외상 먹기를 좋아한다. 「카페」에서는 물론 요릿집에서까지 현금을 내고 먹는 것은 이름없은 촌 사람이 하는 일이지 서울 바닥에서 으스대는 술손들은 외상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 그래야만 으스대는 하나의 허영이었을지도 모른다.
『돈 안가지구 왔다 내일 받으러 오너라』 큰소리치고 나서야만 대장부답게 생각이 들었나 보다. 이런 손님을 놓치면 장사가 되지를 않으니 「카페」 지배인은 일단 담당 여급에게 책임을 지우고 외상을 준다. 외상은 술값뿐이 아니라 여급의 「팁」까지도 외상이다.
춘자·화자·옥자에게 3원씩 적어 두라. 호기가 지나치지만 그래야 상객 노릇을 하고 여급들이 따르게 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술값은 일본술-정종이라는게 1홉짜리 한 병에 30전, 양주라는게 한 잔에 50전 정도였고 여급의 「팁」은 으례 계산서에 1할을 가필한다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곁에 앉아서 흠씬 「서비스」를 한 여급에게는 적어도 2∼3원은 따로 주었으니 3인이 들어가 한 잔 마시면 아무래도 10원 이상 20원은 내놓게 된다.
더우기 사교춤이라는게 차차 유행이 되니 술김에 한바퀴 휘돌고 나면 「파트너」가 된 여
급에게는 별도로 1원 한두 장쯤 주어야만 체면이 섰다.
지금도 1원짜리 주화가 있지만 값어치가 거의 없어서 아이들도 5원 이하는 거의 돈으로 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때 1원이라면 지폐로 되어 있었고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값어치가 있었다.
지금은 「카페」 대신 「카바레」라는 게 생겨서 술 마시고 아가씨와 춤을 추고 제법 흥겹게 놀고 있는데 전만 못한 것은 여급들이 너무나 극성스러워진 것이다.
「팁」을 주고받는데도 전에는 그런대로 어딘가 인정이 숨어 있었지만, 요사이는 거의 투쟁이다. 먹느냐, 먹히느냐, 단판씨름이다. 수줍어 하는 「서비스」, 주머니 끈을 늦추고 느긋하게 마실 수 있는 술자리가 아쉽다.
따지고 보면, 술 따르는 아가씨가 병통이다.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성이 가신 「서비스·걸」이니 두통거리다. 그런 중에서 「서비스·걸」이 없이 맛깔스런 안주와 진국 약주를 넌지시 내놓는 술집이 있었으니 이름도 간판도 없이 가정적으로 내놓는 술집이다.
이조 말엽 명문 거족 집안의 사치스럽던 음식 솜씨를 이어받은 안사람들이 주인이다. 고하 송진우 선생이 화동에서 찾아가던 「윤 바」에서는 떡볶이가 명물이었고, 인사동 뒷골목에 있던 「김 바」는 이조 명문의 후실로서 아들의 학비를 얻기 위해 술을 팔았으니, 심천풍 선생을 중심으로 한 주객이 찾는 곳이었다. 광교 뒷골목 오동나무 집이며 사직동 조막손이 집이며 무교 다리께 쌍과부집도 유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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