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제25화>「카페」시절(10)|이서구(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금도 그렇지만 극장주변에는 술집도 많고, 호떡집도 그득하다. 해가 저물어 극장 옥상에서 손님을 부르는 날나리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면 극장앞마당은 설레기 시작한다. 그때는 주간흥행은 일요일뿐, 평일에는 저녁 흥행뿐이었는데 가깝게 쳐도 30년 옛일이다. 그러나 입장표를 사는 사람보다는 그냥 서성거리는 젊은이가 더 많다. 구경도 가지각색. 표를 사들고 들어가서 연극을 보는 것만이 구경이 아니다. 모든 출연자는 개막을 하기 전에 먼저 들어가 분장을 해야하기 때문에 관객보다 더 일찍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극장이 문을 열 무렵쯤 되면 한참 인기 높은 남녀배우가 극장으로 들어가는 구경은 돈 안내고거저하는 구경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극단은 조선극장이 아니면 단성사에서 중앙공연을 갖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단성사는 사장 박승필씨가 연극을 좋아하여 극단이 온다면 상영중의 영화를 중지하고라도 맞아들인다. 이래서 한때 단성사는 연극구경꾼의 단골집이 되었지만. 따라서 단성사 일대는 밤이 되면 제법 흥겨웠다. 술집 중에는 어여쁜 「마담」이 치맛바람을 풍기는 신식술도 있어서 이름도 극장과 같은 단성 「카페」주인 「마담」은 기생출신. 손님 다루는 솜씨가 간드러졌다.
단성 「카페」는 한때 인기였다. 변사·배우 등 인기 높은 손이 모여드니 그럴 수밖에는 없다. 당시 서울에서 저만 제일인척 한국사람을 깔보는I소위 내지인이라는 일본사람들도 단성사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때로는 헌병들도 눈에 띈다. 지금 상식으로는 헌병이라면 군인의 풍기나 감시를 하려고 나온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식민지 탄압정치를 펴고 우리를 무작정 억누르는 때이라서 경찰이 할 일을 거의 헌병이 도맡아 했다. 단성사 근처 술집·다방에는 커다란 칼을 찬 헌병이 버티고 앉은 꼴을 흔이 불수 있었다. 「바」주인은 성이 가시건만 취체를 한다고 앉았으니 눈꼴은 사납고 거추장스럽지만 괄시는 못한다. 단성 「카페·마담」은 기생출신이오 중년이자 애교는 만점. 그러나 사람 다루는 솜씨는 천의무봉이다. 일본헌병이 긴칼을 끌고 들어서면 으례껏 반가이 맞지만 원수같이 미웠다.
그러나 아무도 그자를 꺾지는 못했다. 그렇던 그가 한번 되게 얻어맞은 일이 생겼다.
왜정 말 헌병·경찰제도 하에서 칼차고 권총 찬 헌병이 한 조선인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은 자못 중대했다. 『거 참 대단한 사나이로군. 헌병을 두들겨 패다니….』 모두들 혀를 내두르며 무명용사의 장한 용기를 칭찬했다.
그 사람이 바로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어 한일전의 총수가 된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청년이었다.
알고 보니 트집은 헌병이 먼지 잡은 것이었다.
칼자루를 뻗치고 앉아서 제가 제일인척 큰소리를 칠 때 김 청년은 아니꼽고 치사해서 그놈의 칼을 발길로 찼다. 헌병은 대노하여 김 청년을 치려했으나 맞을 리가 없다. 날쌔게 피하며 반격이 맹렬하니 아무리 헌병이라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뒤 헌병이 떼를 지어 김두한 청년을 잡으러 나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김두한 청년은 단성사 뒷골목에서 일약 영웅이 되고 모두가 그 용기에 탄복했다.
뒷날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기행과 견주어 볼 때 그가 어려서부터 타고난 반골 인성 싶다.
이때 이미 서울에는 새바람이 불기시작. 요리집이니, 기생이니 하는 것은 차차 구식으로 몰리고 「카페」니 「바」니 하는 서양식 술집이 흥청거리는 판이라서 돈냥이나 지닌 기생 중에서 시대에 눈물 뜬 사람들은 아담한 찻집이나 은근한 술집을 구미고 단골 손님만 기다리는 장사가 성행했다.
처음 시작은 일인 촌이라는 본정·명치정·장곡천정 같은데서만 볼 수 있던 「카페」가 얼마 안 가서 종로 뒷골목·관철동·인사동·수은동·공평동 일대가 더욱 번창하고 수익도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인들은 아무리 잘난척해도 모두가 식민지로 밀려온 월급쟁이들이지만 그들이 일컫는바 조선인은 비록 천대는 받아도 돈은 잘 쓴다.
돈 가지고 오는 손님을 상객으로 치는 「바」·「카페」에서만은 조선인이 아니라 조선양반이다. 게다가 일인의 주객은 질이 거칠지만 5백년 수도서울에는 귀공자도 많아서「카페」에서의 「선인」의 인기는 아무리 「내지인」이라 해도 당할 길이 없었다. 비록 술집에서나마 선인이 내지인을 꺾어 눌렀다는 사실은 한결 흐뭇하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