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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국에 잇단 정변-아프리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50년대 후반기부터 서방식민지동치에서 대거 독립을 쟁취, 민주정치의 아장걸음마를 해온 아프리카 대륙에서 미처 걸음마를 면하기도 전에 성급한 군복의 등쌀에 민주정치의 유아사망률이 높아져 가고 있다. 최근 가나의 군사 쿠데타는 1963년이래 실로 21번째 합법정부의 전복정변으로서, 이제 3억 『검은 대륙』에서 1억 아프리카인들이 직접 군정통치를 받고 있다. 국가 수로 보아 거의 반 가까운 14개국이 갖가지 구실로 민주정치를 외면한 군인들의 혁명위원회 통치하에 놓여있다.
가나의 쿠데타는 몇가지 점에서 아프리카의 비극을 더욱 부각시켰으며 그 충격파고는 높았다. 무엇보다도 가나는 아프리카의 수준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 그 의식수준이 비교적 세련된 나라로 꼽혀 왔다. 또 구세주를 자처, 영구집권을 꿈꾸던 응크루마 독재정권을 전복시킨 군인들은 l969년8월 자신들의 참여 없는 민정을 회복시키고 원대 복귀했었다.
그들은 민정이양 후 이른바 통령평의회를 구성, 민정복귀 후의 정권 후견역을 맡으려고는 했으나, 신정권의 요청으로 이것마저 해산시켰다. 따라서 가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민주적 자유선거를 통해 민정을 회복한 최초의 나라로서 새로운 본보기가 됐었다. 며칠전의 쿠데타는 이 본보기 민정을 짓밟고 수많은 직접 군사통치국가군의 대열에 끼어 들었다.
아침퐁 중령이 이끄는 가나 구국평의회는 코피·부시아 정유을 전복시킨명분으로 ⓛ응크루마 독재정권이 남겨놓은 외채 소산과 경제문제 처리에 미흡했고 ②가나의 사회에 팽배한 부패를 일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들은 응크루마 정권의 전복 후 69년8월의 민정복귀 때까지 약3년간 군사정권이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 못했던 사실은 지적하지 않았다.
전 군사정권이 자신의 참여 없는 민정이양을 단행한 어쩌면 응크루마가 남긴의 처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코피·부시아 문민정부는 복당하기 전에 많은 난제를 안고 있었다.
4억 달러의 외화보유고로 출발했던 응크루마는 66년 실각당시 외화 준비고는 단 1천만 달러뿐, 오히려 6억 달러의 외채를 짊어지고 있다가 군사정사에 넘어갔다.
다시 이 외채를 이어 받은 부시아 수상은 증설, 수출증대와 수입억제, 개발 프로젝트의 축소 등으로 경제난관의 타개에 대처하려 했다. 또 원리금 상환이 스케줄 재조정에 성공했으나 보다 높은 금리의 부대조건이라는 대채를 지불해야했다. 증설를 위한 조세부담은 중산층과 공무원에게 가중됐으며 수입억제를 위한 12월의 48%의 평가절하는 상대적으로 물가고에 부채질한데다가 이 나라 주요수출품인 코코아의 국제시장 가격이 50%가까이 폭락했었다.
경제난국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적인 과오를 범했다. 그는 비만의 소리를 억눌러 난국을 타개해보려는 우를 범했다.
그는 우선 법원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했다. 언론을 괴롭히고 학생들의 항의를 탄압했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상인들을 추방하는가 하면 순종하지 않는 노동조합연맹을 해산시켰다. 더욱이 그는 국가 전체의 영도보다도 행정업무의 부담을 너무 많이 걸머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는 일부 세력이 기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응크루마의 정권을 넘어뜨렸던 군부보다 이번에 부시아 수상정부를 물리친 아침퐁 군사정부가 반드시 더 잘 난국을 처리해 나가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다만 다소나마 희망적인 것은 외채상환에 안간힘을 다하는 저개발국, 특히 의회민주제하의 저개발국에 너무나 가혹한 외채원리상환조건을 요구했던 일부 선진국 차관주들이 가나의 예를 감안하여 국가별 배려를 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독립의 홍수이래 아프리카의 민주정치발전은 가나의 군사 쿠데타로 일보 후퇴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민주정치를 염원하는 아프리카 민중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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