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학 쉽지만 법적으로는 학교 아닌 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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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의 한 사설 외국어 교육 시설에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이런 시설들은 학부모 사이에 국제학교로 통한다. 김경록 기자

유학 또는 숨 막히는 대치동식 교육의 대안으로 국제학교에 관심을 갖는 부모가 많다. <江南通新 11월 6일자 1~4면> 그러나 이마저도 원한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우선 비싼 학비와 먼 거리 통학이 장벽이다. 송도와 제주의 국제학교 4곳 모두 입학과 편입 경쟁률도 만만치 않게 높다. 서울·경기 도심에서 통학하며 국제학교와 비슷한 교육을 받을순 없을까. 방법이 없지는 않다. 바로 ‘미인가 국제학교’라고 불리는 외국어 교육 시설이다. 점점 더 많은 학생이 몰리고 있지만 한국 교육 시스템의 관리 감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점도 있다.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강동구에 있는 한 캐나다계 외국어 교육기관 1층 상담실에서는 입학 상담이 한창이었다. 이 시설은 학부모 사이에서 ‘미인가 국제학교’로 알려진 곳 중 한 곳이다.

 이 학교 교무처장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 인가를 받아 캐나다 BC주 교육부에서 직접 학력 관리를 하기 때문에 BC주에서 발행하는 정식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한국에선 학원으로 등록돼 있어 한국 학력은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기관은 학교가 아니라 법적으로는 학원이다. 그런데도 지난해 80여 명으로 개교한 이후 1년여 만에 정원이 220여 명으로 늘 정도로 인기다. 시설은 지하 2층, 지상 8층짜리 건물 한 동 전부를 쓴다. 학원이지만 학교처럼 운영한다. 이곳 외에도 서초구의 다른 캐나다계 ‘미인가 국제학교’는 재학생이 250여 명, 또 다른 미국계 한 곳은 150여 명이 재학 중이다. 모두 법적으로는 학원이다. 미국계 미인가 시설 관계자는 “미국 내 학력인증기관 중 한 곳인 어드밴스이디(AdvancED)로부터 사립학교 인증을 받은 교육 기관”이라고 말했다. 이들 시설의 1년 학비는 급식과 셔틀버스 이용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000만원 안팎이다.

 강동구의 미인가 시설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요새 사립초와 미인가 국제학교를 놓고 저울질하는 부모가 많다”며 “사립초에 들어가도 영어는 수준에 맞춰 A-B-C반으로 나누기 때문에 상위반인 A반에 들어가기 위해 다들 학원을 찾는다”고 말했다. 학교 수업과 사교육으로 애 고생시키느니 비록 미인가이지만 국제학교로 전학을 시킬까 고민 중이라는 얘기다. 이날 만난 또 다른 엄마(송파구)는 “큰아이는 유학 중이고 작은아이를 이곳에 보낼 계획”이라며 “나중에 기회를 봐서 해외로 보낼 생각도 있다”고 했다.

  아이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영어를 배울 수 있게 하거나 해외유학을 위한 징검다리로 미인가 시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남 초등학교에서는 짧게는 1학기에서 1년 정도 해외연수를 대신해 미인가 시설에 다녀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송도 채드윅이나 NLCS 제주 같은 정식으로 인가받은 국제학교도 있는데 왜 미인가 시설을 찾는 걸까.

 한 엄마는 “외국인 학교는 자격요건(해외 거주 3년 이상)이 안 되고, 송도나 제주는 너무 멀고 연 3000만~4000만원대로 비싸다”며 “반면 이런 도심형 국제학교는 근거리 통학이 가능하고, 학비도 2000만원대로 제주·송도보단 상대적으로 저렴하다”고 말했다.

 정식 국제학교보다 들어가기 쉽다는 점도 미인가 시설 인기에 한몫한다. 『국제학교 입학 가이드』를 쓴 안윤정 에듀프로아카데미 대치 원장은 "송도 채드윅은 경쟁률이 7~8:1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처럼 도심형 미인가 시설은 근거리에서 통학하며 해외 학교 학력을 인증받을 수 있어 주로 해외 대학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유학 대체지로 찾는다. 전국에 11곳이 있다. 이동준 교육부 평생학습정책과 사무관은 “학원 등록조차 하지 않은 곳까지 감안하면 미인가 국제학교 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인가라는 걸 다 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서초구의 미국계 미인가 시설에 재학중인 10학년 학생은 “다 해외 대학을 목표하기 때문에 한국 학력 인증은 신경 쓰지 않는다”며 “혹 국내 대학을 가더라도 검정고시를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미인가 시설은 예기치 않게 학부모와 학생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정식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 외에도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 관리·감독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원생이 줄어 학교가 갑자기 폐쇄됐을 때 다른 학교 전학 등 후속 조치를 받을 수 없다. 이런 경우 국내 초·중·고교로 편입하려고 하면 재입학시험을 치르거나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아예 거짓 광고로 학부모를 현혹하는 곳도 있다. 박영희 세쿼이아그룹 대표는 “미국 각 주의 교육부는 공립학교에 대해서만 관리·감독할 뿐 사립학교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는다”며 “미 교육부 인증을 받았다는 광고를 하는 학교가 있다면 거짓 광고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학원 등록조차 하지 않아 법망에서 벗어나 있는 미인가 시설은 더 문제다. 대안학교지만 은근슬쩍 국제학교라고 홍보하는 경우가 많다. 라은종 교육부 학생복지정책과 사무관은 “관리 규정이 없다”며 “신고 없이 운영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교육 환경과 교사 수준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최근 ‘미인가 국제학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동준 사무관은 “학원으로 등록한 뒤 학교 형태로 종일반을 운영하는 건 불법이어서 학원법과 초·중등 교육법 위반 혐의로 몇 곳이 고발됐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강동교육청과 성남교육지원청 관계자들은 "서울 BCC캐나다, 세인트폴, CBIS와 분당 BIS캐나다를 고발했다”고 말했다. 이 사무관은 “경찰 조사 후 위법으로 판단된 곳에 대해선 등록 말소와 시설 폐쇄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CBIS 등 고발된 시설 관계자들은 "학교라고 홍보한 적이 없다”며 "학원으로 설립해 운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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