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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사과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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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민소영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4학년

사과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의 가을은 사과 한 상자를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매일 아침 잘 씻은 사과 한 알을 깨물며 아침 졸음을 깨는 일을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여기는 계절.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한 농장으로부터 사과 한 상자를 주문했다.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가을볕에 빨갛게 잘 익은 사과는 보기에도 참 예쁘고 먹음직스러웠다. 한 입 깨물어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 향긋한 사과즙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하지만 지난해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올해는 사과가 이상하리만큼 너무 빨리 썩어버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보관을 잘못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한 상자를 뚝딱 해치운 뒤 또다시 주문한 사과는 하루가 지나자 멀쩡한 사과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절반은 고사하고 거의 대다수가 짙은 갈색을 띠며 군데군데 잔뜩 썩은 모습이었다.

 “다행히 올해는 태풍 피해가 없고 작황이 좋아…”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신문기사 한 줄. 그러고 보니 올해는 큰 태풍이 지나간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곤파스·볼라벤 등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태풍들은 모두 작년 이맘때쯤 한반도를 스쳐간 대형 열대 저기압들이다. 다른 친구들이 맹렬한 비바람에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질 때 가지 끝에서 오들오들 떨며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열매들은 수확의 기쁨과 함께 사람들의 손길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삶을 파고드는 수많은 가시들이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힐링이라는 이름의 진통제를 자연스럽게 찾곤 하는 세상. 누구나 편안함을 누리길 원하는 세상이지만, 늘 행복하고 기쁜 일만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지는 않는다. 거센 태풍을 두려워하고, 취업문을 두드리며 맛보는 실패와 낙방, 좌절에 사시나무 떨듯 긴장하며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던 모습이 ‘썩은 사과’와 묘하게 겹쳐졌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이 있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 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수많은 실패의 과정에서 우연히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이른다. 에디슨의 전구에서부터 포스트잇, 페니실린의 발명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지어진 사마천의 역작 『사기(史記)』까지 화려한 역사의 이면은 땀과 눈물, 열정으로 흠뻑 젖어 있다.

최근 전국에 400여 개의 점포를 연 가장 인기 있는 ‘밥버거’ 업체를 이끄는 한 청년 사장은 고백한다. 만약 자신이 처음 주먹밥을 팔던 고등학교 앞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도 발전 없이 계속 고등학교 앞에서 주먹밥을 팔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비바람을 견뎌낸 뒤 더욱 알차고 맛있는 열매를 맺을 사과나무의 꿈처럼 20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날들도 더욱 빨갛게, 탐스럽게 익어가길 꿈꿔 본다.

민소영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