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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미·소 공동위원회(19)제21화|문제안(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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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북 우편 교환(하)>
김선유씨가 펜으로 써서 마련한 가 협정문서는 6·25 때 없어져 버렸다.
이 협정에서는 차편이 있을 때 우편물을 교환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느 사이엔가 1주일에 1회씩 교환되고 토요일에 늘 이루어졌다. 그것도 1차 교환에서 51차까지는 토요일이었다가 52차에서 1백65차까지는 목요일에 교환했었다.
이 사이 몇 번인가는 금요일에 교환되었다.
전회에서 말했지만 소련군의 열차가 개성역에 들어오면 미군이 포위 경계하는 바람에 소련군 측이 불편을 느끼자 46년 봄에는 소련군의 불평을 늘어놓은 주장으로 교환장소가 여현으로 옮겼다.
여현은 38선 바로 북쪽이어서 이번에는 미군열차가 소련군의 포위를 받게되어 불편했다. 미군은 열차를 포위하는 것에 그쳤으나 소련군은 예사로 열차 안까지 들어와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우편물 교환 때는 언제나 역두에서 군인들의 포위 속에 교환되었지만 우편물을 교환하고 난 다음에는 신문도 바꾸었다. 1주일 치의 신문을 무더기로 바꾸었다.
담배도 나누어 피웠다. 이쪽에서는 카멜 터키·스타라이크 등 양담배를 내 놓았고 북쪽에서는 일본 사람들한테서 압수한 미도리를 내놓기 일쑤였다.
소련군들도 양담배를 좋아했고 특히 미제 비누를 좋아했는데 나중엔 물건들을 너무 많이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련군 안에서 말썽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 뒤는 이쪽서 주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편물 교환이 늘 순조로 왔던 것은 아니었다.
이 때는 우표를 발행하지 않아서 일제 때의 우표를 쓰고 모자라는 요금부분은 다로 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 때의 우표는 발행처가 조선총독부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북에서 오는 편지는 우표가 없었는데 46년 12월 입법의원이 생겼을 때는 북에서 이 우표의 조선총독부에 시비를 걸어온 일이 있었다.
북쪽 우편교환원들은 그런 우표가 붙었다면 안 받겠다면서 행낭을 뜯어 뒤지기도 했었다. 이 일로 우편교환이 한 때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48년5월10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남·북간의 우편물 교환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일단 중지되고 한 때는 교환 정지론이 크게 일어났으나 남·북간에 헤이진 동포끼리 소식을 알자는데 나쁜 것이 있느냐 하여 다시 계속되었다.
그런데 당시 북쪽에서 보내오는 편지에는 주소가 없는 것이 꽤 많았다.
주소 없는 편지가 많아서 47년 봄에는 중앙우체국 뒷마당에 편지를 내 놓고 편지 찾아가라는 공고를 낸 일조차 있었다. 그러다가 미 군정청당국은 정직하게도 이 배달불능 편지를 모두 북으로 되돌려 보내 주었다.
이 대 교환된 우편들 가운데는 소포도 있었으나 많지 않았다. 맨 마지막으로 교환 된 것은 6월23일인데 이날까지 교환된 편지는 남에서 북으로 간 것이 1백92만통이었고 북에서 남으로 온 것이 96만3천통이었다.
이 우편물 교환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안부 편지가 오갔으나 북괴는 차차 이것을 조작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약용하려들었다. 남쪽에 잇는 사람이 북에 있는 친척에게 옛날주소대로 편지를 보내면 그쪽에서는 숙청 등으로 친척의 주소가 바뀌었을 경우 등에서 가짜 편지가 오는 것이었다. 차차 선전 섞인 편지가 오다가 6·25가 터진 것이었다.
지금 한창 남·북 적십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20여년 전에 우편물을 교환한 경험에 비추어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소공 위에 시작에서 붕괴한지 2년이 남짓한 동안 사귀었던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에피소드 몇 토막-.
하지 중장의 고문 겸 통역이었던 이묘훈 박사는 당시에는 누구보다도 하지장군과 가까왔다. 이 영만이 싫어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이묘훈은 전혀 인연이 없이 영어 하나로 사귀었던 것. 이 박사는 해방되자 코리아·타임스를 창간했었다. 하지가 한국 상륙 직후인 46년9월15일께 한국의 언론인들을 초청, 간담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이 때 유창한영어로 해박하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가 놀라 경력을 물으니 그가 이묘훈이었고 자신보다 월등히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하지는 이묘훈을 고문으로 모셨던 것이다.
공위의 미측 통역으로 활약한 사람 중 허현이 있었다. 이 분도 코리아·타임스의 편집국장 등을 지내고 성균관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는데 통역으로 있을 당시 한국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고 통역·선언서 번역 등에서 크게 이바지했다. 고정훈씨는 노어·영어로 남일과 싸우는 등 일화를 남겼다. 매스컴에서도 인물이 많았다. 당시 합동통신에서 나오던 설국환씨는 언제나 기사를 앞질렀고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80%는 이설씨가 합동통신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현 「브라질」대사 우석찬씨, 말레이지아 대사 김성용씨 등이 기자로 공위를 취재했고 김호진씨(대한적십자공보부장), 신태민씨(현 서울신문논설위원)도 많이 활약했다.
남·북 우편물 첫 교환 때의 일인데 김호진씨와 최경덕씨가 특종사진을 찍어 마감 시간에 내려고 개성∼서울간을 질주하다가 임진강변에서 차가 굴렀으나 다행히 차만 망가지고 무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유택씨의 『부산화폐개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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