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의 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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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글 반포 5백25주를 기념하는 한글날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이날을 제정하게 된 뜻은 더 말할 것도 없이 5백20여년전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 정신으로 돌아가 우리의 언어 생활을 순화하고 고유한 민족문화의 빛을 더욱 찬연한 것으로 계승발전 시키자는 데 있다.
그러나 한글날인 오늘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려야할 것은 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본뜻과는 달리 우리는 지금 이 한글로 말미암아 도리어 국민의 언어생활에 있어 막심한 혼란을 야기시키면서 기성시대와 자라나는 새 세대 사이에 언어생활과 전반적인 문화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 실로 우려할만한 문화의 단기현상을 초래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원인은 일부 편벽한 한글전용 논음의 주장이 한글의 가치를 고조하는 나머지 한자교육의 전폐라는 폭거를 서슴지 않고 저지른데서 야기된 것이다.
언문정책 논하면서 그것을 편벽한 애국심이나 도덕론과 결부시키는 것처럼 어리석은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 병)은 없는 것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언어 문자는 그것이 현재의 국민생활에서 통용되는 사상전달의 수단으로서의 일용적 효용성과 함께, 그것을 매개로 하여 전통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새로운 사상·문화를 창조하는 문화기능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극렬적 한글 전용논고의 주장은 전기한 일용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후자인 언어문자가 갖는 문화매개 기능을 고의로 무시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문화생활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할 것은 『한글전용』과 『한자교육의 폐지』문제와는 이론상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도 국민의 일상생활에서 한글전용으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뚜렷한 이익을 모르는바 아니며, 더군다나 모든 공용문서나 법률용어의 한글표기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이론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급 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누누이 주장하는 것은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언어문자는 그 일용적 효용성 말고서도 그것이 가진 문화기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지적되고 있는바와 같이 고교교육을 받고서도 신문 한 장 읽지 못하는 반문맹자를 배출하고 있다는 비난은 차라리 덮어 둘 수도 있다. 한글로만 표기된 신문이 없는 것도 아니요, 그들은 언어 때문에 일상생활상 반드시 특별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을 가진 어버이와 어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히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일부 소설류를 제외하고 적어도 전통 문화와 관계 있는 일절의 기록이나 서적들은 물론, 심지어 모든 고적과 사찰에 걸려있는 현판 한 장마저도 한자어에 대한 지식 없이는 단 한 줄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아버지 서재에 곽 들어찬 장서를 두고서도 단 한 권의 독서를 해내지 못하는 고등·대학생 자녀들의 존재를 일상적으로 목격하면서도 그래도 한글전용을 위해 한자교육 폐지론의 정당성을 강변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벌써 문화와는 무연의 사이비 문화인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자 한자교육의 폐지로 말미암아 각급 학교 학생의 사고력과 독서력에 중대한 결함이 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 실험적 연구에 의해 실증되고 있는 터이지만, 우리의 전통문화0하고는 비교적 생소한 영·독·불어까지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는 각급 학교교육에서 한자교육의 전폐를 고집하는 망발은 이제 단호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국 일본의 예를 들출 필요도 없이, 국민학교 과정에서도 1천3백자 정도의 상용한자 교육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뿐더러, 도리어 사고발달과 학습능률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이번 한글날이 지금까지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던 우리 나라 언문정책에 일대반성을 촉구하는 날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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