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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거제도폭동(3)|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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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군도 「도드」준장의 피랍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공산포로의 정체를 깨닫고 단호한 태도로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클라크」대장은 수용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무력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미제2사단부사단장으로 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령관으로 임명된 「헤이든·브트너」준장은 「클라크」장군의 명령을 어김없이 이행하여 그렇게도 기세가 등등하던 공산포로들의 무릎을 꿇게 했다. 「보트너」준장은 태평양전쟁 때 오랫동안 중국에 근무해서 중국말을 유창히 구사하고 동양인의 심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산포로를 다루기에는 안성맞춤의 군인이었다.
「보트너」는 거제도로 부임한 지 꼭 한달 만에 최종단계에서는 무장군인을 수용소 안에 투입시켜 포로들과 한차례 전투를 치르면서까지 포로들의 난동을 완전히 진압했다. 10만 포로부대를 편성해서 거제도를 점령한 다음 남해안에 상륙, 지리산과 태백산의 공산 「게릴라」와 합류시키려던 북괴의 어마어마한 음모는 반공포로들의 과감한 투쟁과 함께 「보트너」준장의 단호한 태도로 좌절됐다. 그럼 이제부터 미군이 거제도사태를 수습하기까지의 경위를 「클라크」장군의 저서 『다뉴브강부터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할·베터」저 「거제도반란」(Mutiny on Koje Island), 「T·R·페런바크」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과 그 밖의 자료·증언 등을 통해서 살펴보겠다.

<보트너소장이 사태수습>

<5월11일에 「도드」준장을 석방시키기 위해 공산포로들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했다고 취임 4일만에 수용소사령관직을 해임 당한 「찰즈·콜슨」준장 후임으로 거제도에 온 「보트너」준장은 점진적으로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출 때까지는 일을 서둘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준비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도 규모가 작은 막사를 짓는 일이었다. 공병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막사를 짓고있었다.
수용소마다 「스탈린」·김일성·모택동의 초상화와 적기가 걸려 있었다.
경비병들은 그것을 떼라고 말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보트너」장군으로서는 어느 수용소든지 무장병을 투입시켜 공산주의자들의 초상화를 찢는 것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적은 피를 보지 않고 그것을 달성하는데 있었다. 세계의 눈은 「도드」사건다음에 또 미국이 어떤 망신을 당하는가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보트너」는 일차목표를 중공군포로수용소에 두었다. 포로들에게 낮12시까지 적기를 내리라는 최후통첩이 무시되자 그 시각에 경비병상사가 수용소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즉시 2대의 「탱크」가 문안으로 들어가고 이어 총검을 든 보병이 뒤따랐다.
5분 안에 적기와 초상화는 철거되고 미군은 아무 사고 없이 원위치로 돌아왔다. 공산포로는 꼼짝 못했다. 「보트너」는 매일 「탱크」를 수용소 부근에 산개 시키고 중무장한 보병을 행진시켜 무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해서 우선 1단계에서는 공산포로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10일이 걸린 이 단계에서는 포로들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들을 제압했다. 이 무렵에 「클라크」대장이 8군 사령관 「밴플리트」장군을 데리고 거제도로 날아왔다. 「보트너」는 「밴플리트」가 잠자코 서 있는 동안 「클라크」에게 상황보고를 했다.
보고가 끝나자 「클라크」는 『자네는 내가 시킨 대로했군. 자네는 언제나 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게』라고 격려했다.

<클라크·밴플리트 의견 틀려>
「클라크」와「밴플리튼」의 두 대장은 「도드」준장에 대한 견책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물론 전자가 상관이기 때문에 「도드」와 「쿨슨」두 준장은 그의 상신대로 대령으로 강등되긴 했었다.
「클라크」대장이 새삼 「보트너」준장에게 신임을 표시한 것은 다분히 이런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보트너」가 부임한지 얼마 안 있다가 「밴플리트」장군이 홀로 이곳에 와서 『우선 치안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평양과 판문점의 공산측 휴전회담 대표인 남일의 지령이 거제도에 직통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보트너」는 「밴플리트」에게 치안을 확보하려면 수용소 부근에 있는 수천 명의 민간인을 전부 이동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후에도 며칠동안 포로수용소는 행상인과 창부와 그리고 공산측 간첩들과의 접촉이 계속되고 있었다. 민간인들이 철조망 너머로 포로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예사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들이 「보트너」에게 왜 그런 일을 묵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밴플리트」장군 지시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후 「밴플리트」장군의 명령은 곧 취소되었다. 「보트너」로서는 한국 민간인을 철거시킬 수 있는 아무런 법적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약간의 행동만으로 족했다. 그는 주민을 철거시킬 때 폭력행사를 엄금하고 그들이 이사할 때 사용할 수 있게 「트럭」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2일만에 수용소 부근에서 민간인은 사라지고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주민토지보상문제 미결>
여기서 잠시 「메인·스토리」의 전개를 중단하고 이때의 상황을 거제도 원주민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주민들은 공산포로와 간첩과의 접선을 끊기 위해서는 소개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하루아침에 피난민 신세가 되어 피해와 고생이 많았다고 상당히 신랄하게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더우기 아직도 그때의 피해보상이 다 해결되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말하고있다.
▲제익근씨(당시통영군청서기·현 거제군 공보실장·45) <거제도에는 한때 포로와 피란민이 무려 20만 가까이 수용됐었어요. 이북서 온 피란민은 수용소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으로 장사에 혈안이 됐어요. 52년5월에 「도드」피랍사건이 난 후 수용소주변의 민간인, 2천1백16가구에 24시간 안에 소개령이 내렸어요. 우리가 소개한 계룡 국민학교를 제외한 모든 가옥과 건물을 태워버립디다. 능한 돈 뭉치만 가지고 훌쩍 떠났지만 토박이 원주민들은 일시에 생활터전을 잃고 피해가 많았읍니다. 대부분의 살림도구는 그대로 두고 나갔으니까요. 소개된 주민의 3분의1은 집단수용 되고 나머지는 친척집을 찾아갔어요. 휴전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많은 고생들을 했지요. 수용소가 폐쇄될 때 「퀀시트」8백68동을 인계 받아 임시 거처로 이용했어요. 돌아온 허허벌판이 된 농토를 피와 땀으로 다시 개간해서 오늘의 신현면을 이룩한 겁니다.>

<포로들 외부와 물품거래>
▲유상언씨(당시거제도주민, 현 거제군 신현면 고현리서 농업·56)<50년11월초부터 논밭을 무조건 징발해서 「불도저」로 밀어대고 군용 「텐트」로 임시막사를 만듭디다.51년 초봄에 폭풍이 불어 「텐트」막사가 모두 날아가는 소동이 벌어진 후 반영구식 막사를 지었어요. 피란민중에는 수용소물자로 한밑천 잡아 가지고 부산시장으로 진출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포로가족도 피란민 속에 끼여 있었어요. 포로가 보급품을 담요에 싸서 철조망 밖으로 내던지면 가족이 받아다 팔고 했어요. 그러니 한마디로 질서가 엉망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도드」사건으로 비로소 정신을 차린 미군들이 수용소와 민간인들과의 접촉을 끊기 위해 소개령을 내렸어요. 이런 처사를 십분 이해는 하지만 막상 당하는 주민이나 피란민은 고생이 심했지요.
그리고 수용소 설치 부지 안에 있던 원주민은 처음부터 피해가 컸고요. 수용소설치당시 고현 일대의 주민은 1천4백 가구에 징발된 토지가 2백50만평 가옥이 3천여 호였습니다. 휴전조인 후 수용소가 폐쇄될 때 신봉권씨와 내가 제일먼저 돌아와 원주민 복귀 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신위원장은 서울보사부로 수없이 올라가 우선 수용소 막사 8백83동을 인수하여 주택으로 쓰게 했어요. 그리고는 온 주민이 발벗고 나서 토지개간을 했어요. 이때 식량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농토를 일궜읍니다.
이 일이 4년이나 걸렸는데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의 한 축도 같은 광경이었읍니다.

<수용소땅속서 칼등 발견>
53년에 처음으로 징발보상을 냈지만 허탕이었고 다시 제반 서류를 갖추어 민정 이양 후, 국방부와 각 요로에 제출했어요. 이때 서류뭉치가 한 짐이나 돼서 인부를 사서 운반했어요. 이러다가 겨우66년에야 토지사용료 3백만원을 처음 받고 67년에는 가옥보상비로 5천만원을 받았어요. 토지원형복구비(개간비)는 아직 해결이 안돼 작년12월에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토지원형복구비5억원을 배상해 달라고 6·7대 국회에 계속 청원했지만 잘 안돼 할 수 없이 법을 통한 해결을 호소하게 된 거지요.
처음에 인수한 수용막사 건물을 뜯으러 들어가 보니까 공산포로 간부회의실은 그들이 별도로 만들어 놓기까지 했읍디다. 개간할 때에는 땅속에서 깡통으로 만든 칼창·방독면 등이 수없이 나왔어요. 또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까지 땅속으로 굴을 뚫어놓기도 해서 개간이 그만큼 더 힘들었지요.>
◇주요일지(1950년 12월30, 31일∼1951년 1월1일)
※12월30일 ▲「유엔」군, 전전선에서 38선 이남 16㎞까지 철수 ▲MIG 40대, 미F-86기 15대에 도전 ▲서울시 미가급 등
※12월31일 ▲적, 대공세 개시 ▲개성에 적 대병력집결 ▲소련, 경제학자 「코즈로프」숙청
※1월1일 ▲중공군 6개군단, 총공격개시 인적부대, 고랑포 남방 진출 ▲불 대통령, 호지명과 화평의사 표명 ▲「유고」1만1천명의 정치범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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