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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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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로잔」·「홍콩」회담의 급요>
첫 번 대화는 63년1월24일 「로잔」에서, 두 번째가 63년5월17일의 1차 「홍콩」회담, 마지막이 63년7월26일의 2차 「홍콩」회담이었다.
남북간 최초의 대화인 「로잔」회담은 제59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동경「올림픽」대회(64년)에 남북한 단일 「팀」 구성을 결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63년1월24일에 열렸다. 이 회담에는 한국에서 KOC위원인 정월터·김정연·손기완씨 등이 참석했고 북괴에서는 김기수(체육지도위원회위원장) 등이 나왔다.
이 회담에서는 단일 「팀」이 사용할 국기문제·국가문제·선수 및 임원선발 문제가 토의되었다.
두 번째 남북대화는 「로잔」회담에서의 미 합의사항을 토의하기 위해 63년5월17일 「홍콩」에서 열렸는데 한국 측에서는 이효 KOC위원장을 비롯하여 황엽(부위원장) 정상윤·조동재씨(이상 KOC위원) 등이 참가했고 북괴는 김기수가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담에서는 「올림픽」 전 종목에 걸쳐 예선경기를 치르기로 합의하고 예선방법은 쌍방 경기단체별로 협의하되 재정부담은 각자가 맡기로 했다.
63년7월26일에 열린 제2차 「홍콩」회담에서는 1차 「홍콩」회담 미합의 사항을 최종 토의할 예정이었으나 2시간10분만에 결렬되어 단일 「팀」 협상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
국토가 갈라진 뒤 남북이 남북한 단일 「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통해 대화를 나눠본 것은 단 3번뿐이었다. 한국적십자사가 제의한 남북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제네바」예비회담이 실현될 것인지 가슴 죄는 것도 3번에 걸친 『「스포츠」회담』이 번번이 결렬됐기 때문이다. 60년대 초반에 있었던 「스포츠」회담은 64년 동경「올림픽」대회에 남북한 단일 「팀」 구성을 위한 대화였다.
남북간 최초의 대화인 「로잔」회담은 제59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총회의 주선으로 열렸는데 당시 우리 나라 대표로 고 이상백씨와 함께 참석했던 정월터 박사(성창해운 고문)는 『당시엔 5·16군사혁명 직후라 별로 준비도 없이 참석했는데 북한대표들은 고분고분 미소정책으로 우리에게 접근해 왔었다고 말했다.
『「올림픽」 단일 「팀」을 구성하기 위해서 국기에 태극「마크」를 넣자고 제의하자 북한대표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지요. 우리는 애국가를 부르자 저들은 저들 노래를 부르자』면서 물과 기름처럼 초장부터 맞아 들어가는 것이 없었다』고 정월터 박사는 회상했다.
「로잔」회담엔 손기정씨와 김정연씨도 참석했는데 김정연씨(대한속도빙상연맹명예회장)는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우리는 당시 「올림픽」위원회(KOC)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한 입장이었으므로 북괴측이 억지 웃음을 띠며 바싹 접근해 왔지요』라면서 『「마라톤」왕 손선수는 물론, 대동강에서 「스케이트」를 했던 나의 과거까지 샅샅이 아는 것을 보고 단단히 준비를 해온 듯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표단보다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더많이 회담장을 서성거리는 등 북괴대표들은 감시의 눈초리 속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것이다. 약할 때 고분거리고 강할 때 뻣뻣한 것이 공산당의 생리인지라 북괴는 나중에 국제「올림픽」연맹에 개별적으로 가입이 되면서 고자세를 취했는데 63년5월에 있었던 1차 「홍콩」회담이 그러한 것이었다.
「홍콩」회담에 참석했던 조속재씨(「아시아」재단)는 『공산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모든 언동을 맞춰나가기 때문에 회담에서도 민족의 통일이니 「아마추어」 정신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들도 북괴노동당의 노선에 맞지 않으면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것을 잘 알아야 될 것이다』고 말했다. 「로잔」회담에서 「올림픽」 단일 「팀」 사용할 국기(오륜「마크」에 KOREA를 새겨 넣은 것)와 국가(1945년 이전의 아리랑 곡조)가 결정되는 듯 싶었으나 선수단구성을 둘러싸고 「홍콩」회담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북괴 측에선 김기수(체육지도위원회위원장)가 6명의 대표만을 이끌었는데 손선수를 가르쳤다는 이일성이를 데리고 와서 위세를 부리기도 했다. 「홍콩」회담에선 「올림픽」 전 종목에 걸쳐 예선경기를 치르기로 합의하고 예선방법은 쌍방경기단체별로 협의하되 재정부담은 각자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쪽은 「남북한 단일 팀을, 북괴는 「전 조선유일팀」을 주장, 「팀」명칭으로부터 예선대회장소, 예선 일자, 선수훈련, 임원구성에 있어 번번이 의견이 맞서 회담은 겉돌기만 했다.
남북이 회담장에서 마지막 갈라서던 63년7·26 회담만 해도 북괴대표 김기수가 1차 회담보고 가운데 『한국측이 비밀회담의 내용을 공개, 한국측의 무성의를 사과했다』는 등을 평양방송을 통해 공표 함으로써 정치선전에 안간힘을 다하는 바람에 2시간10분만에 3차 「홍콩」회담은 끝장나고 말았다. <최규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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