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즈 제2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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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실상의 평화로 슬라이딩하는 것이 곧 남북화해의 길이다.』
「필릭스·M·로저즈」소장의 말이다. 28일자 성조기(미군기관지)는 한국군사정전위 유엔측 수석대표의 임기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전면에 걸쳐 싣고 있다.
「슬라이딩」(sliding into…)이라는 말은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뜻이다. 많은 어휘 중에 하필이면 꼭 그 말을 끄집어 내 쓴 것에 묘미가 있다. 은근한 분위기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퍽 무디한 연상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우리 나라의 휴전을 『19세기적 외교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19세기적이라면 「고전적 전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때의 평화는 곧 전쟁의 종결만으로 가능했다. 굳이 평화조약이 없더라도 종전 혹은 정전이 평화의 「팡파르」였다. 사실 1차 세계대전은 「휴전」으로 끝장을 보았었다. 이른바 로저즈의 말마따나 「헤이그」회의(1899년5월18일)는 국가관계를 두 가지 상태로만 규정했었다. 교전국이냐, 비 교전국이냐로 구별을 지은 것이다. 사실 한반도의 남북현실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러나 「로저즈」의 『제2중대발언』에 해당하는 것은 그런 상황 설명이 아니다. 그는 정전위를 「공개」와 「비공개」로 나누고 있다. 그는 「비공개」라는 말 대신에 「사적회담」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북괴는 공개회의 석상에선 관례대로 장광설의 선전용 「욕지거리」를 퍼붓지만, 「사적회의」에선 『업무적』이고 『음성도 낮아지고』 『상냥해 진다』는 것이다. 로저즈는 이것을 가장 느리긴 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평가했다.
『만약 무슨 일이(판문점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사적인 회의에서 일 것이다.』 로저즈 소장은 이렇게 장담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판문점 회의를 공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도 갖고 있다.
휴전협정에 따르면 평화를 위한 「정치회담」의 가능성은 아직 상존해 있다. 다만 그 분위기만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다. 만일 혹 「사적회담」이라는 「비공개합의」가 정치회담으로 변화된다면 상황은 또 180도 회전할 것이다. 판문점은 말하자면 그런 복잡한 정치적 절차를 생략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라는 것도 새삼 의미가 없지 않다.
물론 태평양의 평화무드가 금방 판문점에 「오린지」바람을 몰고 오리라는 생각은 너무 성급하다. 그러나 판문점의 일각에선 눈에 보일 듯 말듯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것 같다. 「로저즈」는 「유엔」군 측이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두개의 카드를 더 쥐고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그 1개 외국군인의 말에 귀가 번쩍 하는 우리의 처지는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아뭏든 무엇인가 「변화」의 징후가 있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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