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제15화>자동차 반세기|서용기(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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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운송사업개화기>
1920년대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나라 운송사업은 처음으로 개화기이자 경영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승합 「버스」업은 1919년 말부터 호경기를 맞아 사업이 잘 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지방에서 돈께나 있다는 대부분의 지주들이 운송사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전주의 최종렬·승렬 형제가 일본인 산본이 경영하던 산본 자동차부를 인수한 것도 그 무렵으로 안다. 최씨 형제는 그때 쌀 1가마에 6∼7원할 때 2만원을 주고 차 5대와 전주∼남원, 전주∼군산노선 영업권을 산것으로 들었다.
그때까지 만도 자동차사기가 무척 힘들었다. 지금의 서울정동에 미국인이 경영한 「모리스」상회라는 자동차 판매의 대리점이 문을 열자 그 앞은 성시를 이뤘고 심할 땐 차를 사려는 사람들이 골목을 메워 순경이 「포플러」가지를 꺾어 사람을 좇던 일도 있었다.
그때는 차 1대에 2천5백원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지방마다 운수업 「붐」이 일어 경쟁이 심했다.
최승렬씨에게서 들어보면 가장 치열한 경쟁지역의 하나가 전주였었다. 그들 최씨 형제가 공화 자동차부를 시작한 이듬해 자본금10만원의 군산자동차와 마학진이라는 사람이 한꺼번에 전주∼군산 노선에 뛰어들어 피나는 싸움을 벌였다고 들었다.
제일먼저 넘어진 것이 군산자동차였지만 먼저 시작한 최씨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마씨는 가장 최신형 차를 일본 대판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자연 새차로 사람이 몰려 헌차로 운영하던 마씨는 그때까지 만도 자동차판매를 독점하다시피 한 직거 상회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다.
끝내 경영 「미스」로 마씨마저 10만원쯤 손해를 보고 김진기라는 전주사람에게 영업권이 넘어갔는데 보다못한 석전 전북경찰부장이 1923년에 김씨 소유마저 최씨가 사도록 종용하여 최씨의 판정승으로 끝났다고 밝혔다.
최승렬씨는 지금도 그 일을 두고 석전에게 농락 당했다고 분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전은 그 얼마 후에 또 다른 업자에게 영업허가를 내줘 경쟁을 붙이고 넘어지면 매수토록 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석전은 허가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웠다는 것이다.
그때는 손님들이 차부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 전화 1통화만 하면 차가 대문 앞까지 가서 경적을 울려 손님을 실어 날랐다. 아침 6시차라면, 5시30분께부터 그렇게 돌아다니다 6시에 차부로 돌아와 최종적으로 승객을 태워 떠났다.
어떻게 생각하면 업자들의 수난시대인 것과 다름없다고 여겨진다. 경쟁이 심하니 자연히 승객에게 아첨 안 할 수 없고 그만큼 「서비스」를 잘하려 애썼다.
진주∼금천 노선도 치열한 경쟁지역이었다고 들었다. 대구사람 이장우가 경영한 남선 자동차와 염고의 경남자동차, 지방유지들의 합자회사인 선남 자동차 등 3개 회사가 혈전을 했고 끝내는 당국의 권고로 통합되어 거창자동차라는 새 회사로 발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농번기가 되면 손님이 없어 빈차로 왕래하기 일쑤였고 업자들마다 여름철 적자를 면하는 방책을 생각해내느라고 고생들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무렵 총독부에서 승합자동차 조례를 공포했다. 정확한 날짜는 1929년4월18일로 안다.
자동차로 8인승「도드」T형에서 9인승·10인승·14인승 등으로 차종이 다양해지기 시작하고 대량 수송으로 한걸음 씩 발돋음하기 시작했다.
승합자동차 조례는 너무 심한 업자들의 경쟁을 지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의 경쟁은 너무 심했다.
경남지방에서는 도산·폐업하는 업자들이 속출하여 1921년에는 도 당국이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즉 경쟁방지와 업자상호간의 융화 등 공존공영을 목적으로 하고 경남 자동차 협회라는 것을 추진하여 그 이듬해 실현을 보고 1개 노선에 한 영업자의 원칙을 만들었고 종업원 임금도 통일해 주기로 합의를 본 것 등 운수업자 모임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운수업계는 비록 혼전을 벌인 경쟁시대였지만 노선개발 등 여객운송업이 한창 꽃피울 단계였다.
그때 강원도의 최준집, 전북의 최승렬, 함남의 방의석·예석 형제, 공주의 김갑순씨 등이 운수업계의 거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일본사람·길전·궁본 등과 함께 조선자동차운수조합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의논이 오간 것으로 본다.
전국적으로 승합운수업자는 조례가 공포되기 전까지 만도 1백52명이었는데 일본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설철도에서 그야말로 철도의 영양선으로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고 큰 도시에서는 부영 「버스」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경성의 경우엔 마야정일이 부윤으로 있을 때라고 기억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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