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직접 대화」론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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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수석 대표 「필릭스·M·로저즈」미 공군 소장은 3일 AP통신의 「에드윈·Q·화이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8년간 판문점에서 열려온 군사정전위원회의 성격과 활동에는 이제 변화가 있어야 할 때가 왔으며, 이 변화를 가져오는 한가지 현명한 방법은 「유엔」측 수석 대표를 한국인으로 바꾸어 「한인과 한인끼리」 대화케 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의 이와 같은 발언이 단순한 개인적 의견만은 아닐 것이라는 관점에서 깊은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국제 정세의 급변과 더불어 한국을 중심으로 한 내외 정세에도 심상치 않은 변화의 물결이 굽이 치고 있는 이때이니 만큼 그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땅에 존속해 오던 판문점의 존재 양식에도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남북간의 긴장이 완화되어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굳이 정부간 「레벨」이 아니라 하더라도, 남북간에 뭣인가를 얘기하기 위한 대화의 「루프」로서 판문점이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으며, 그 단계에 대비해서 한국 대표가 현재의 군사정전위원회에 정식으로 참가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 밖의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로저즈」대표가 말했듯이 북괴는 판문점을 선전 마당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한국 대표가 나가서 보다 능동적으로 그것을 분쇄한다는 선전전에서의 전략·전술적인 이점도 가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지금은 주한미군이 감축되어 서부 전선마저 우리 국군이 방위를 맡게 됨으로써 이에 따르는 판문점의 주변 정세도 과거와는 스스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기술적인 견지에서는 휴전 협정 제2조 B항에 『정전위는 10명의 고급 장교로 구성하되 그 중의 5명은 「유엔」군 총사령관이 임명하도록…』돼 있으므로, 한국은 비록 협정 당사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유엔」군 총사령관이 한국인을 그 수석 대표로 임명하면, 군사정전위에 회담 당사자로 참석하는 데에는 별로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것이 실현되기에는 그 명분과 실리, 시기와 단계, 여건, 절차 등 모든 문제에 걸쳐서 허다한 문젯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8년 전 휴전 협정 조인 당시 한국이 동 협정을 반대하고 서명하지 않은 것은 북괴를 응징하지 못한 채 한국의 분단을 국제적으로 영구화할 뿐만 아니라 군사정전위에서 우리측이 북괴와 공식으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결과적으로 북괴를 국제법상 1대1의 당사자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만일 한국이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에 정식 수석 대표를 내보낼 때 우리는 북괴 측을 당사자로 해서 맺어놓은 휴전 협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될 때 급기야는 「두개의 한국」을 우리 스스로 자인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또한 남북간의 직접 대화는 현재로서는 국내법상의 질서에도 근본적으로 저촉되는 문젯점을 안고 있다. 또 이 점을 덮어둔다 하더라도 시기와 단계가 문제인데, 대화라는 것은 긴장완화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며, 긴장 완화조차 이루어질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이때 대화 운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아울러 우리가 날카롭게 주시해야할 것은 미국이 이 시점에서 왜 「남북 직접 대화」 론을 끄집어 낸 것인가 하는 그 배경이라고 하겠다. 이른바 「닉슨·독트린」의 제창과 더불어 미국은 주한미군을 감축했고, 급작스럽게 중공과의 해빙을 모색, 작년 「유엔」총회 때부터는 명백히 「두개의 중국」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그들의 대 중공 접근책의 일환으로 한국사태 역시 한 묶음으로 분석하고, 같은 공식을 적용하려 할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미국의 책임은 물론 「유엔」의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내놓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잘못된 분석과 판단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미국의 일방적인 유화가 한국의 긴장을 완화시키기는커녕, 북괴의 남침을 위한 오산을 가져오게 할 것이며, 그러한 북괴의 지위를 오히려 높이는 우를 범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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