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의「모자이크」…경쾌한 희극적 율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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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연극에서 늘 심각한 의미를 찾으려는 그릇된 경향에 대해 모자이크 같은 에피소드를 연결하여「즐거운 연극행위」를 제시해 보려는 이번 실험극장의『알 수 없는 노릇이군』(원명『메테오』)은 몇 가지 가능과 제한을 시사해 준다.
나신의「신」은 그것이 예술공간의 이용도인 한에서 예술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그 영역의 한국적인 제한은 예술의 제한이다. 필요에 의해서는 제한에 도전하는 예술적 결단이 요청된다.
경쾌한 희극적 율동 속에 간간이 끼어 드는 멜러 드라마 적 생리는 전체적인 톤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의 일부는 처져 버린다. 비록 작품의 결함에서 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연출에 의해 차단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인 것이다.
상황설정은 죽음이 없는 축복 받은 생, 부활이나 영생도 짐이 된다는 성서적 패러디다. 기도의 대상이 된 죽음이라는 역설 때문에 1966년1월 취리히 초연 때 독신이라고 규탄 받기도 한 이 작품의 주인공 슈비터는 자의에 반해 자꾸 살아난다.
그래서 관객은 끝까지 허점을 찔린다. 주변에 있는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죽어 가는데 진작 죽고 싶은 주인공은 죽어지지 않는다. 낮이 계속되면 미친다는 이런 희극적인 비극의 상황 속에서 코미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반복의 형식과 무대시간은 권태와 자동 인형 화 되는 현대적 인간의 상황과 일치되어 있다.
슈비터 분의 오현경은 인간적인 온갖 세균이 득실거리는 죽음을 객관적으로, 즉 거리를 두는 희극으로 체 현 하는데 몰두한다. 이의 죽음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사회적 연관 속에 드러나는 사악에 대한 방기로서의 죽음이다. 에피소드의 연속 속에 등장하는 다른 등장인물은 성격으로서 보다 도형으로서의 효과가 적격이며 그 점에 있어서 연출(황은진)과 연기는 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그 연출의 희극적 문제 제시의 수법은 모범적이다. 연극 일반에 대한 것으로 대사 전달의 훈련은 역시 문제로서 남지만 무대 장치나 의상·소품 특히 조명 등 보조기능의 계산적인 동원은 이번 공연의 앙상블에 활력소로서 기여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상일<연극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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