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빙벽에도 해동은 오는가|유엔군의 비무장환원과 민간인 이용 제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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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주한 유엔군이 12일 북괴에 제기한 비무장지대의 환원 제의는, 도도한 동서 해빙 기류와 관계없는 듯 냉전의 전설처럼 군사 긴장이 팽팽히 도사리고 있는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조짐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바람은 실제 냉전의 서막이 되었던 한국전쟁을 종결지은 휴전이 조인 된지 18년이 흐르는 동안 한반도에 두껍게 결빙되어버린 냉전의 잔해를 서서히 거둘 기세일수도 있어 보인다.
한반도에 이 같은 기운이 서서히 태동하는 것은 긴장된 세계를 녹여버리는 세계조류에 비추어 당연한 귀추로도 사가된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당장 그렇게 속단되기엔 의아와 주저가 앞서는 것은 한반도의 빙벽이 도전되기에는 너무 두꺼운 때문일까?
그러나 12일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필릭스·M·로저즈 소장이 이례적으로 내놓은 제의는 적어도 이에 도전하는 일종의 평화제의임을 느끼게 한다.
로저즈 소장은 『본래의 목적대로 비무장 되었어야 할 비무장지대가 침략의 목적으로 요새화 하였고 무장되었다. 이제 쌍방은 이같은 모든 무장을 파괴 또는 철거, 모든 한국인(남북한을 가리킴)을 평화와 통일에 이르도록 하자』고 이례적으로 부드러운·어조로 말했던 것이다.
그의 부드러운 어조는 지난 18년간 행해온 화법과 내용에서 전혀 변화를 찾아볼 수 없은(적어도 외견상은) 북괴의 상투적 대응자세를 미리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로저즈 유엔군 대표는 세계사상 가장 긴 휴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판문점회담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 신념을 가지고 있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무장지대의 의의는 평화적 완충지대로서 적대행위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정전협정은 최후적인 평화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모든 적대행위와 무력행위의 완전경지를 보장하는 목적과 정신을 지니고있다. 나는 최근 이러한 비무장지대의 목적과 의의를 오랫동안 음미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정전협정이 목적한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구체적 조치를 쌍방(유엔과 북괴)이 취하는 것이 이제 필요하다.』 이렇게 말한 로저즈 대표는 이같은 목적을 위해 구체적 협상에 들어가자고 역설하면서 비무장지대를 원상 환원하는 첫 단계 조치로 중부전선 금화동 북쪽지역에서부터 무장제거 작업을 공동으로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또는 북괴가 이 지역에 10개 소의 요새를 새로 만들었다고 사진을 보이면서 설명했다. 그의 어조는 이같은 협정위반에 대한 상투적인 비난과는 명백히 다른 어투였다.
북괴대표는 『유엔군이 정전협정의 수호자인 것처럼 하는 술책을 쓰지 말라. 유엔군이 먼저 침략을 목적으로 협정을 위반, 비무장지대를 무장했다』고 응수했다.
이에 대해 로저즈 대표는 『한반도에 평화와 신뢰와 안전의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올 유엔 군 측의 진지한 제의를 신중히 검토하라』고 종용하면서 앞으로 협상의 세부사항은 비서장 회의서 다룰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놓았다.
남은 문제는 북괴의 태도뿐이다. 언제나 침략을 꾀하고 무력 통일을 신조처럼 되뇌던 북괴가 재 남침과 침투의 목적으로 만든 비무장지대의 무장을 해제시키도록 설득한다는 것은 힘겨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2일의 판문점 제의는 한국문제에 관한 한 새로운 장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이같은 제의가 심상찮은 국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데서 추적할 수 있다.
첫째 포터 주한 미 대사·미켈리스 유엔군 사령관이 미 하원 비밀 청문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증언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미국이 대 중공 통상 관계를 상당히 개방하는 것과 때를 같이 미-중공관계 개선의 막후 조정자로 알려진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대통령이 중공에 이어 평양을 방문하고 있을 대 이 제안이 이루어진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없다는 상황이다. 미국이 화해와 협상의 두기치 아래 냉전체제의 점진적인 해체를 통해 세계의 새 질서의 정립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다. 닉슨·독트린에 따라 자체적으로 주한 미군 일부를 스스로 철수한 미국이이제 당사자 쌍방이 스스로 참여하는 적극적인 긴장완화조치를 구상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만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제의는 북괴의 대응 여하간에 미국의 확고한 한반도 긴장완화책이 쌍방의 체면을 지켜줄 정전협정의 정신 테두리 안에서 가장 편리하고 무리 없는 첫 시도로 던져진 주사위로 관측되고있다.<조성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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