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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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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노무현 대통령이 안 지사를 청와대로 불러 같이 손 잡고 잠을 잤다.”

 누(累)가 될까봐 청와대엔 얼씬하지 않았다던 안희정 충남지사를 노 전 대통령이? 처음 듣는 얘기여서 재차 확인했다.

 “진짜 그랬나.”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2003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인사와 대선자금 사건 관련 대화를 나누다 튀어나온 일화였다. 대선 때 자금관리를 맡았던 안 지사가 구속되기 직전의 일이라고 했다.

 10년이 흐른 지금에도 ‘차떼기’란 말이 통용되는 데서 알 수 있듯 대선자금 사건은 국가적 난제였다. 구습(舊習)이자 구악(舊惡)이 터진 거였다.

 노 전 대통령은 줄곧 “흉을 드러내고 벌 받을 건 받고 사죄하고 습관을 바꿔야 나라가 바로 가고 정치가 바로 간다”는 입장을 취했다. 청와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쓴 채였다고 한다. 감옥행을 앞둔 안 지사와 밤을 보낼 정도니 노 전 대통령의 개인적 고통도 극심했을 터였다. 그로 인해 노 전 대통령의 ‘정통성’은 상처를 입었다. 참모들의 우려대로였다. 하지만 그 후 돈 선거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과거에 비하면 ‘푼돈’은 오가도 대규모 자금을 동원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됐다. 결과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결정으로, 또 그의 상처와 고통 덕분에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좀 더 나은 모습이 된 셈이다.

 사실 애초 심각성만 보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은 대선자금 사건에 못 미친다고도 볼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일이 있었느냐. 발본색원하겠다”고 하면 끝날 일이어서다. 어차피 전 정권에서 발생한 일 아닌가. 국정원을 손보는 김에 국민적 박수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런저런 쟁점들이 떠오르면서 국정원 댓글 사건은 ‘대하 서사극’이 됐다. 번외 편 격으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논란에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예비음모 사건까지 나왔다. 최근엔 1993년 하나회 척결 이후 정치 중립이라고 믿었던 군마저 유사 댓글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이젠 댓글의 대선 영향력이 없다고 봤던 이들도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일제히 대통령에게 돌리고 있다. 대통령의 침묵에도 주목한다. 앞으로 침묵은 웅변일 터이다. 그리고 놀란다. 현 정부의 위기 무시로 인한 위기 자초 능력에 대하여, 또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을까 말까 한 일로 키워놓고도 팔짱 끼고 있는 ‘대범함’에 대하여 말이다.

 새 정부 1년을 이리 보낼 순 없는 일. 청와대의 생리를 아는 인사들에게 타개책을 물었다.

 “ 이런 사안을 다룰 만큼 청와대가 유연한가. 청와대가 움직이면 당이 받쳐줘야 하는데 그럴 만한 당인가. 누군가 야당과 물밑협상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있나. 그나마 ○○○ 등이 역할을 할 만한데 청와대가 최근 씹는 인사들 아닌가.”

 A는 그러곤 “새 검찰총장이 권위를 가지고 수습하길 기다릴밖에…”라고 했다. 별 불상사 없이 국회를 통과한다는 전제에서도 12월 초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B는 “(윤석열 등 댓글 수사 의지가 강한) 특수통 검사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들이 대통령에게 흠 가는 일을 피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자칫 항명검사와 싸우려다 국민과 멀어질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흠집이라도 갈까 특수통 검사들을 험하게 내쳐 종국엔 이런 사태를 불러온 이들이 과연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C는 청와대 대신 실세가 막후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가 “참, 그런 사람이 없지”라고 했다.

 요체는 지금처럼 해선 곤란하다는 건데, 고집스럽다 싶을 정도로 과거의 방식과 사람을 고수하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수용할까 회의하던 중 D가 말했다. “새로운 이슈가 생기면 되지. 북한이 있잖아. 김정은.”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