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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부른 공명심…『히말라야』도전|현지에서 본 두 원정대실패원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예년에 없이 경쟁적으로 「히말라야」등반에 나섰던 한국의 두 산악 「팀」은 모두 희생자만 낸 채 23일「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완전 철수했다. 「마나슬루」등반대 (대장 김호섭 등 6명·산높이 8,156m)는 정상정복 5백여m를 남기고 안타깝게도 대원 김기섭씨(24)의 추락사로 등반을 포기, 철수했으며 대한산악연맹의「로체셜」 등반대(대장 박철암 등 10명·산 높이 8,383m)도 대원 권영배씨(27) 만을 고산병환자로 만든 채 도중철수의 고배를 마셨다. 현지에서 살펴본 이 같은 두 한국산악원정「팀」의 실패 원인은 예년에 없이 조기 엄습한「프리·몬순」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두「팀」이 경쟁적으로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무리를 빚었다는 점과「팀」구성자체가 똑같이 허술했다는 점을 들을 수 있었다.

<두「팀」지나친 경쟁심>
올해 17개「팀」이 도전한「히말라야」는 6명의 희생자를 낸 불운의 해로 막을 내렸는데 악천후의 조짐이 「시즌」벽두부터 깔렸었는데도 한국「팀」이 정복의 공격을 계속 무리하게 감행했던 것은 불행을 자초한 셈.
이들의 「캐러번」의 헛점은 전문적인 산악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분석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모순을 드러냈다.
먼저 「마나슬루」「팀」의 경우 지난해 10월부터 김인식군 등을 선발대로 보내어 정찰업무를 마치고 최신 급의 장비를 갖추는 등 사전준비에 노력했던 점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팀」의 기본적인 취약점은 주력대원이 너무 적었다는 것과 「리더」를 중심으로 한 전진대원이 공명심에 사로잡혀 정복욕에만 급급했었다는 점이다.
적어도 고도 8천m급의 등반에 전대원이 6명(그나마 1명은 여자) 뿐이었다는 것은「팀」구성자체가 너무 안일했었다는 비판을 벗어날 길이 없다.
주력대원의 약체에서 드러난 헛점은 정상정복 직전에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던 지난5월4일 하오6시의「캐러번」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냈다.

<중요한때에 캠프 안해>
이날 「캠프」의 위치는 제5「캠프」의 최전선이 7천6백m지점이었다. 당시의 「캐러번」은 최전선에 김호섭·김기섭 형제와「셸퍼」3명, 제2선인 제4「캠프」 (고도 6,970)에는 정 대원은 한사람도 없었고 후원사인 서울신문 사진부차장 이종기씨와「셸퍼」 3명이 있었을 뿐 나머지 주력대원은 모두 4천3백m지점의「베이스·캠프」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주력대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최창돈·한이석 김정심 등 3명이 고산병 증세로 불편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김호섭 형제「팀」의 조급한 공명심과 의무감 (한 대원의 말)이 실패의 원인을 자극했다.
이들 두 형제가 제4「캠프」를 떠난 것은 4일 상오10시. 이날 아침은 날씨가 기막히게 좋았다. 「히말라야」의 날씨는 오전 중에는 청명하지만 오후에 들어서면 눈보라가 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이들이 떠난 시간은 늦은 시간이었다. 이날아침5시쯤만 출발했더라도 사정은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늦게 떠난 이들은 이미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 하오4시지나 7천8백m 지점까지 무리하게 전진했으나 도중에 빙벽을 만나 다시 2백m쯤 후진, 7천6백m 지점에서 하오6시께 제5「캠프」를 설치하려고 했다. 바로 이때에 비운의 돌풍이 몰아닥쳐 김기섭 군이 희생되고 만 것이다.
만일 그날 하오 늦게까지 조급하게 등반을 서두르지 말고 적당한 지점에서 「캠프」를 설치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날씨가 잔잔한 시간을 택해 정상에 접근했더라면 정상정복에 성공했을는지 모른다. 이절호의「찬스」를 놓친 것을 현지 산악전문가들은 책상을 치며 아쉬워했다. 결국 두 형제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캠프」를 안전하게 설치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무리한 전진만을 계속하다 실패의 원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식량보급 안돼 곤경에>
또 하나 이「팀」에 결정적으로 아쉬웠던 헛점이 있었다. 사고 하루전인 5월3일 이 「팀」은 한때 7천2백m까지 전진 제4「캠프」를 설치하려 했으나 그때 운반되어온 산소 통이 겨우 6인분 24밖에 없어「셸퍼」를 포함한 일부 주력 「팀」의 이동이 불가능했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때 산소만 충분했더라면 7천2백m에 제4「캠프」를 설치, 다음날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을 그 기회도 또한 보급이 따르지 못해 놓치고 말았다. 이때는 이미 식량조차 모두 떨어졌다는 대원들의 말.
「로체셜」 「팀」의 운영상황을 보면 더욱 한심스러웠다는 것이 현지에 와있는 산악전문가 들의 분석이다. 이 「팀」은 등반시초부터 무엇에 쫓기는 듯이 서두른 조급한 등정을 감행했다.

<하루 2천8백m 강행>
이「팀」이「카트만두」에 도착한 것은 3월24일 앞서 15일전에 출발한「마나슬루」 「팀」을 뒤쫓기 위한 경쟁심이 작용한 탓인지, 10명의 대원이 4t의 장비를 전세기에 싣고 부랴부랴 「루크라」 까지 날랐다.「루크라」 는 등산「코스」의 관문으로 정상적인 산악등반으로는 「루크라」까지 「캐러번」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도 이 「팀」은 본래의 등반목적마저 어기고 비행기로 나른 초「스피드」의 행진을 시작했다.
등정 표에서 본 이 「팀」의 「캐러번」은 하룻사이 2천8백m를 오르고 권영배 대원이 고산병으로 쓰러진 4월7일까지 5천3백20m에 전진,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이때 정상「컨디션」을 유지한 대원은 최수남 대원 하나뿐 강호기부대장 등 거의 전원이 고산병 증세로 앓았다.

<「자일」은 겨우2천m>
더구나 「로체셜」「팀」의 구성은 약체였다. 고산 원정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대강 박철암씨와 부대장 강호기씨 정도뿐.
10명의 대원에게 준비된 장비 및 보급품은 4t (「마나슬루」「팀」은 6t). 암벽등반에 가장 중요한「자일」조차 2천m분뿐이었고 심지어 『간식준비 마저 안되어 굶었다』(대원 양 모씨의 말)고 불평할 정도였다.
결국 「마나슬루」「로체셜」「팀」은 출발당시의 거창한「팡파르」에 비해 어처구니없는 희생만 낸 채 흐지부지 철수했다. 공교롭게도 두「팀」은 오는 74년도에 다시「에베레스트」를 정복하겠다고 각각 「네팔」 외무성에 등반허가를 신청했다.
「히말라야」등반을 『정상에 태극기를 꽂는다』는 행진곡풍의 마구잡이 열기에 사로잡혀서도 안될 것이다.
「히말라야」는 높고도 험하다. 꾸준한 계획과 노력 없이 의기만으로 오르려 한다고 해서 정복되는 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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