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설|정창범<문학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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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대 대통령선거 때 여당후보는 문예중흥을 공약했고, 야당후보는 작가 기금 제도를 공약했다. 마침내 승리한 여당후보는 야당후보가 내세운 공약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 믿어지는 사항은 앞으로의 시책에 적극 반영할 것이라고 다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빠른 시일 안에 야당 후보가 공약한 작가기금제도를 마련해주길 바란다. 작품을 쓰고자 하는 작가(소설가 시인 비평가 희곡작가)가 신청하는 경우 작품을 쓰는 동안에 소요되는 생활비와, 그리고 출판 비를 공여해 주거나 무이자로 대부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국자는 작품의 주제내용에 대해서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꽤 별안간 이런 제의를 하게 되었을까, 50여편을 넘는 이달의 소설을 읽는 동안 양적 한계에 비해 질적 한계가 너무나도 빈곤하다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소재와 주제 내지는 형식이 예상외로, 수준이하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생각할 때 아무래도 작가들의 생활빈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그들은 1주일 내내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일요일 겨우 틈을 내서 안 써지는 글을 억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문적인 작가로서 만사를 내던지고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틈틈이 어쩌다가 작품을 쓰고있는 작가들인 것이다. 그러니 작품인들 오죽하겠는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그리고 마음껏 작품을 쓰게 하라.
이호철의『l971년의 종』(월간중앙)에 나타나는 작중인물 「송석구」는 이른바 대학교수라는 이름의 지식인이다. 자각적인 존재로 사고적 계층으로서의 지식인인 「송석구」는 일종의 자학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세미나」에 제출할 보고논문은 이미 고료를 받아놓고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 뒤가 문제이다. 유성온천에서 논문을 쓰는 대신에 여자와 정사를 나누고, 논문을 쓰는 대신에 「세미나」에서 「메모」를 가지고 강연을 한다.
그 강연의 취지는 결국 무슨 「운동」이니 무슨 「세미나」니 하는 것 자체가 여자와 정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 보다는 <두부 하나 똑똑히 찾아먹는 자기>가 되자는 것이다.
「송석구」는 지식인으로서 자학을 되씹고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의 위선적인 가면마저도 벗기고자한다. 그의 행태와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송석구」는 자학 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되면 지식인은 영영 구제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 구제를 찾아야 한다.
작가도 작품을 통해서 그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호철은 자학만을 그리고 있다.
강용준의 『관포지교』(현대문학)는 일종의 희화이다. 희화의 효과는 사람을 웃기는데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처음부터 우습지가 않다. 이른바 인력수출을 맡은 <동진 개발 진흥공사의 포병 장교출신 예비역 중령>인 「김부식 과장」은 부정·부패의 표본이다. 그는 <길>
건너 모나코 다방의 콧대높은 진 마담과 1주일의 토요일에만 한번씩, 한달 간을 8만원 계약으로>재미를 볼 정도의 수입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 수입원은 파월 기술자 지망자에게서 건당 10만원씩 뜯어내거나 청부받은 응시자들의 수험 지를 시험관의 인장을 40개나 위조해서 깨끗이 개조해 버리는데 있다. 그러한 「김부식 과장」은 예비역소령인 죽마고우 마저 등쳐먹고도 시치밀 떼고 있다. 이 작품은 과연 「픽션」일까 「넌픽션」일까. 허구라면 참 재미있는 얘기다. 그러나 「넌픽션」이라면 부정 축재에 관한 조사자료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탁번의 『실종』(현대문학)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작중인물「서준태 중위」는 도망병인 자기 부하를 찾아 나섰다. 결국은 찾아냈다. 그런데 원대복귀한 사람은 도망병이었고 실종해버린 채 끝내 소식을 알 길이 없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준태 중위」였다. 그의 실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군기 상으로 본다면 그의 실종은 외부에 공표 할 수 없을 정도로 군대위신을 추락시킨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군대의, 위신을 손상시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이런 작품을 쓴 것은 아니다.
군대라는 집단을 하나의 「시추에이션」으로서 빌어온 데 지나지 않다. 그의 실종은 작품의 전후 맥락으로 볼 때 그럴싸한 동기라곤 없다. 무동기의 실종인 것이다. 동기 없이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어느 모로 동기 없는 자살, 동기 없는 살인과도 통한다. 그렇지만 동기를 찾아야한다. 내재적인, 아니 잠재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서준태」자신일 수밖에 없다. 「서준태」자신도 모르는·자신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바로 부재 하는 자아를 부각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말해둘 것이 있다. 자아와 부재는 하나의 비극인데 이 작품에서는 지금도 비극적인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연히 그렇게 해보는 하나의 모습만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정환의『보관소』(월간문학)에는 물기 흐르는 「페이도스」가 감돌고 잇다. 아들 삼 형제가 말을 걷어붙이고 아무리 아득바득 애써도 째지게 가난하기 만한 그들, 그들은 수레에다 헌책을 심고 이동서점을 경영하고있다.
그들은 마냥 가난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을 느끼지 않는다. 두터운 우애가 그것을 가로 막고있다. 어찌 생각하면 단순한 순정 소설인 듯도 하지만 작품 속에 흐르는 「유머」와 비애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소박한 수채화를 느끼게 해준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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