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하고 싶은, 없애버리고 싶은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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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28면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1946~)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로 빈 대학교에서 연극과 예술사를 공부했다. 『피아노 치는 여자』가 ‘피아니스트’로 영화화되어 유명해졌다.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설들을 썼는데 도발적인 성 묘사 때문에 격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불합리한 권력 관계를 폭로한 공로로 2004년 여성으로서는 열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클레머가 아직도 분주하게 그녀의 성기 안에서 손을 놀리는 동안 에리카는 그의 성기를 팔 하나 간격을 두고 잡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가버릴 테니 멈추라고 한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의지가 그에게 그리 간단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기 때문에 그녀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예술만이 달콤함을 무한히 약속해 준다. 조만간 아랫도리의 부패는 진전되어 더 많은 신체 부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죽고 마는 것이다. 섬뜩해 하며 에리카는 자신이 175센티미터 길이의 크고 무감각한 구멍이 되어 관 속에 누워 있고 흙이 되어 버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녀가 경멸하고 소홀히 했던 구멍이 이제 와서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게 돼 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이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 <45·끝> 미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Die Klavierspielerin)』에서 가장 관능적이고 상징적인 부분을 읽어 보았다. 피아노 선생인 에리카는 금발의 잘생긴 공대생 제자 클레머의 성기만 잡고 있을 뿐, 그와 사랑을 나눌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어머니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어머니의 사육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린 에리카에게 클래식 음악의 길로 나아가라고, 오직 “예술만이 달콤함을 무한히 약속한다”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명분일 뿐,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어린 딸이 밥벌이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되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기대처럼 에리카는 이제 30대 중반 노처녀 피아노 선생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성공한 셈 아닌가. 일찍 죽은 남편 대신 에리카가 경제생활을 하는 덕에 두 모녀는 충분히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그렇지만 언젠가 에리카는 사랑에 빠져 어머니를 떠날 수도 있다. 에리카의 어머니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이 이것이다. 벌이 없이 노후를 홀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는 에리카를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사육해 자신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어머니는 에리카에게서 성적인 본능과 감각을 제거해야만 했다. 성욕이 터져 나와 사랑으로 꽃핀다면 자신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을 테니.

그래서 자신의 몸을 탐내는 클레머의 존재가 에리카에게서는 마지막 구원의 밧줄과도 같다. 그렇지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사육은 이미 완성된 것일까? 에리카는 클레머의 남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이미 아니었던 것이다.

구멍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성기는 에리카의 몸, 그러니까 그녀의 실존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에리카의 성기는 건강하고 젊은 남자 앞에서 전혀 기능하지 못한다. 이런 무감각이 온몸으로 확산된다는 두려움에 에리카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게 자각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미움의 감정이 들지 않겠는가.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미움(odium)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스피노자의 『에티카』중)이라고.

어머니라는 ‘외적 원인’을 생각했을 때 발생하는 슬픔, 이것이 바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기쁨을 지향하고 슬픔을 피하려는 존재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에티카』다른 부분에서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는 대상을 멀리하고 소멸시키고자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물론 가장 큰 복수는 클레머가 아니더라도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럴 때 미워하는 어머니를 드디어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그녀의 아랫도리는 부패했고, 부패는 온몸에 퍼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다. 불감증으로 어떻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자신이 그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밖에 없다. 에리카가 선택한 것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현장을 어머니가 목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에리카가 클레머를 선동해 자기 집에 난입해 자신을 감금하고 구타하도록 유도한 이유다. 감금과 폭력 앞에 있다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통제하고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조치로 에리카는 어머니를 멀리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한때 어떤 남자에게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겼다고 해서,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순순히 포기하겠는가. 심지어 지금 어머니는 “새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동물적인” 본능마저 되찾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에리카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칼로 자해한 뒤 피를 흘리며 남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에리카의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게 된다. “에리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 그녀는 집으로 향한다. 그녀의 걸음은 차츰 빨라지고 있다.”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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