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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낙동강아 잘 있거라(2)|8군의 총반격(2)|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낙동강 교두보를 공격하던 북괴군 13개 사단은 9월16일부터 전개된 미 제8군의 총반격에 맞서 18일까지는 일진일퇴의 격돌을 되풀이했지만, 19일부터는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다가 21일부터는 총퇴각의 징조를 보였다. 8군은 총반격 개시 6일만에 그동안 목을 죄던 적 포위망을 끊어 버린 것이다.
「월튼·워커」 8군사령관은 이제 적 포위망이 분쇄된 것이 분명한 이상 빨리 진격으로 이전하여 인천에 상륙한 제10군단과 손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북괴군 포위망 돌파 작전>
그래서 9월요일에 「맥아더」원수와의 협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8작령A제101호 (1950년9월22일)
(1)당방면의 적저항은 점차 약화되어 이제 8군은 총반격을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 전황은 적중 깊이 돌진하여 가차없는 압력을 가하면서 포위와 우회를 단행, 적 퇴로를 차단하여 그들의 조직적 후퇴를 저지하는 등 적 섬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에 알맞아.
(2)8군은 총반격을 전개, 속히 제10군단과 제휴해서 38선 이남의 적을 포착 섬멸한다.
(3)각 부대의 임무
(A)제1군단=주공을 대구-김천-대전-수원선에 두고 공격을 .계속, 속히 제천군단과 연결하라.
(B)제2사단=합천-고창-안의-전주 강경선에 따라 진격하라.
(C)제25사단=속히 진주를 탈환한 다음 서방, 또는 서북만으로 추격할 준비를 갖추라.
(D)한국군=적중 깊이 돌진하여 도처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면서 38선을 향해 진격하라.
(4)보급=각 부대는 진격로의 요점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켜 보급로의 엄호와 잔적 소탕에 임하게 하고 치안을 회복시키도록 한다.
(5)각 지휘관은 측방의 안전은 고려할 것 없이 일로 돌진해야 한다.
「워커」장군이 22일에 이상과 같은 대담한 추격작명을 하달한 것은 적의 전력이 이제 바닥이 났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군의 이와 같은←확신은 여러 「루튼 룰 통해 입수한 적정에 관한 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특히 9월21일에 미제1기병사단에 투항한 이학구 총좌는 8군사에 가장 귀중하고도 결정적인 적정을 제공했다. 이학구는 남침 때는 2군단작전부장으로 중동부전선의 침공작전을 작성했고, 낙동강 전투 때는 적13사단 참모장으로 있던 머리가 우수한 괴뢰 장교였다.
8군사령부는 이학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다.

<금천 근교서 「탱크」전도>
▲적13사단의 현병력은 1천5백명에 불과하다. 8월 중순 이후의 병원구성은 70내지 80%가 남한출신 의용군으로서 북한출신 군관이나 사병이 이들을 지휘하고 있다. 사단사령부와 각 연대간의 연락이 자주 두절되어 각 연대가 독단적으로 싸우고 있다. 사단에 배속된「탱크」는 모두 파괴되고 포는 야포9문과 1백20㎜박격포 5문이 남아 있으나 포탄이 매우 부족하다.
▲식량은 한달 전부터 반감되어 장병의 체력은 한계점에 이르고 있다.
소화기 탄약은 그런대로 보급되고 있으나 중량의 보급품은 두절되고 있다.
▲체력의 소모와 불리한 전황, 그리고 미군의 치열한 포·폭격으로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있으며, 북한출신 군관들의 독전으로 겨우 붕괴를 막고있는 형편이다.
▲13사단은 9윌 17일이래 현 위치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나, 20일 밤부터 상주방면으로 총퇴각을 하고 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이학구는 자기가 속한 13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나머지 12개의 괴뢰군 사단의 형편도 이와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8군 산하의 제1군단(미제24사· 미 제1기 병사· 한국군제1사· 영27연방여단)과 제9군단 (미제2사·제25사단) 그리고 중동부의 한국군은 「워커」 장군의 추격작명에 따라 23일부터 일제히 낙동강 교두보를 박차고 진격을 개시했는데 각 사단들의 전투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전에 제일 먼저 출동했다가 대전에서 「딘」사단장을 잃고 복수전에 불타있는 미24사단의 경우부터 살펴보겠다. 「존·H·처치」준장의 24사단은 공병대가 서둘러 개설한 낙동강가교를 통해 23일 새벽 일제히 도하했다.
24사단의 대부분 차량에는 『대전을 잊지 말자』는 「슬로건」과 함께 『서울행』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도강 후 김천으로 향해 돌진한 선두의 제21연대는 부율동 입구에서 적105기갑사단의 일부「탱크」와 조우했다. 이 적 「탱크」는 인천에 상륙한 미제 10군단을 격파하려고 낙동강전선에서 이탈, 북상중인 105기갑사단의 일부후미부대였다. 여기서 치열한 「탱크」전이 전개됐는데 적-34보다 월등히 성능이 좋은 미「패튼」「탱크」가 승리했다.

<적10사단, 성주서 궤멸>
한편 미 24사단에 배속된 영27여단은 성주전면의 고지를 공격중 우군기의 오폭으로 89명의 사장자를 내고 고전에 빠졌다.
「처치」사단강은 미19연대의 1개 대대를 부율동에서 남하시켜 성주를 북방에서 공격케 했다. 대대는 야습으로 24일 새벽2시 성주에 돌입하여 동측에서 아직 저항하는 적10사단을 영국군과 협공했다. 이 전투는 25일까지 계속됐는데 적은 2천5백명의 피해를 내고 패주했다. 낙동강전선에 있던 괴뢰군 13개 사단 중 이 10사단은 가장 전력소모가 적은 부대였는데 성주전투에서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한편 경부국도에서 미21연대와 선두를 교대한 제5연대는 24일 새벽부터 김천 동쪽 고지에 있는 적을 공격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김천을 지키고 있는 적부대는 10여대의 「탱크」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서울에서 남하한 제849대전차 연대의 지원을 받은 제9사단이었다.
적9사단은 거창을 거쳐 대전으로 후퇴할 예정이었으나, 적 제1군단주력의 후퇴가 끝나기 전에「유엔」군이 경부국도를 통과할 것 같아서 급히 김천방어에 투입됐던 것이다. 적으로서는 후퇴주력부대가 경부국도를 거쳐 빠져나가려면, 김천에서 미군의 북상을 저지해야만 했다.
그만큼 김천에서의 적9사단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제5연대는 계속 맹공을 가했으나, 6대의「탱크」가 파괴되고 백 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공격은 정돈됐다. 24일 하오에 전황을 살핀 「처치」사단장은 제21연대를 김천북방으로 우회케하여 25일 새벽부터 제5연대와 함꼐께 동북에서 협공케 했다. 이 협공이 주효하여 적은 궤주하기 시작했고 미 제5연대는 하오2시에 김천시를 완전히 탈환했다.

<대전탈환에 전력경주>
숨쉴 사이도 없이 다시 진격을 개시한 미 24사단은 이날 추풍령과 황간사이의 험로를 단숨에 돌파하고 26일 아침에는 영동에, 그리고 27일에는 이미 옥천에 진출했다. 영동과 옥천에서는 적의 저항이 없었다. 이 진격로는 미24사단이 2개월전에 패주하던 길이었다. 27일 상오 6시에 진격을 재개한 사단은 대전 동쪽의 고개를 점령하고 있는 괴뢰군을 공격했는데 이 진지는 대전의 최후방어선인만큼 적의 저항은 치열했다.
이 고개는 굴다리가 두개 있으며 67일전에 24사단이 대전에서 이곳으로 빠져 나오려가 퇴로가 차단되어 분산됐던 곳이다. 그 때 사단장 「윌리엄·F·딘」소장도 마지막으로 이 고개로 후퇴하려다 길이 막혀 36일 동안 적중을 헤맨 끝에 전북 진안군 안천면에서 적 포로가 된 것이다. 24사단으로서는 치욕의 고개였다. 미 공군 경찰기로부터는 대전에 적 대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느니 또는 대부대가 대전으로부터 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뻔질나게 들어와서 24사단장병은 더욱 조바심이 들었다. 빨리 대전을 점령해야만 퇴로를 끊고 적대부대를 포착 섬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괴뢰군탱크 34대 격파>
24사단 19연대는 전력을 다해 이 고개를 공격했지만 돌파할 수 없었다. 「처치」사단장은 할 수 없이 야간공격을 단념하고 28일 아침에 공군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재개했는데 적은 이미 밤새에 이탈한 후였다. 이 고개에서 저항하던 적은 제9사단과 제10사단의 일부병력이었다. 미19연대는 28일 하오4시30분 대전 동쪽으로 진출하여 비행장을 탈환했다.
이어 사단후속부대도 속속 들어와 시가소탕전을 끝내고 28일 하오에는 대전을 완전히 탈환했다. 우연히도 대전과 수도 서울의 수복은 같은 9월28일이었다.
또한 대전에 제일 먼저 들어온 영광의 부대는 24사단의 제 19연대 제2 대대와 제 3 공병대대였는데 이 두 대대는 67일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대전에서 후퇴한 부대였다.
미24사단은 대전시 소탕전에서 34대의 적「탱크」를 격파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대전에는 적의 패잔 7개 사단병력이 집결해 있던 것으로 보아 그들 이 곳을 김웅의 적 제1군단의 첫 후퇴 목표지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이로써 미 사단은 7월20일에 적으로부터 되로 받은 치욕을 말(두)로 갚았다.
※알림
『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11(교환)의 74번, 야문은94-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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