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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1)<제10화>양식 복장(8)|이승만(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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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구경거리 양장 여>
1910년 전후하여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는 양복 입은 사람이 꽤 있었지만 그것은 개화바람을 탄 특수층과 남자들에 한한 얘기이다. 전체 한국인으로 보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활동적인 남성들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여성에게야 말할 나위도 없다. 아예 부녀자가 문밖을 나간다는 걸 우습게 여겨온 구습 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개화의 바람을 쉽게 쏘일 리 만무하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양장화가 늦어진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진작부터 궁중에서는 왕을 비롯해서 고관대작들이 위계에 따라 서양식 대례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왕비를 비롯해 그 밑의 궁녀에 이르기까지는 양 풍을 외면한 터였다. 민비가 왜놈에게 치욕적인 살해를 당하지 않았다면 또 모른다. 외국 여성을 고용하고 또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잦았던 궁중 여성들이지만, 왜놈에 대한 망국의 한이 뼈 속 깊이 사무친 까닭에 양 풍이 곧 부녀자가 절조를 깨뜨리는 행위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 나라 여성으로 비교적 일찍 양장을 한 이는 구한말의 친일 간첩으로서 을사조약 후 이등박문 통감의 수양딸이라고까지 한 배정자이다. 나는 직접 본적은 없으나 1908년 훈련원에서 열렸다는 운동회에 통감부 일인들과 함께 나와있는 사진을 보면 흰옷 차림의 양장이다.
생각건대 그 옷은 구한말에 한국에 와있던 구미 여성들의 복색 그것이다.
앞깃과 소매 끝엔 「프릴」을 화사하게 붙이고, 허리를 잘록하게 죄어 치마가 「플레어·스커트」처럼 폭넓은 것인데 아랫단에 주름을 만들고 우리 나라의 여성 정장용 속치마 무지기와 흡사한 느낌의 것을 치렁하게 입는다. 겨울에는 검정 옷이 많지만 여름옷은 대체로 희다. 거기에 받혀 쓰는 모자는 「카플린」·「파나마」모보다 더 납작한 모자인데 차양이 넓고 「리본」을 큼직하게 달며 때로는 꽃으로 수북히 덮어 머리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는 앞으로 숙여 쓴다. 말하자면「로맨틱·스타일」이다. 당시 외교관 부인들이 공식 연회석에 나올 때는 물론,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 양식 「호텔」을 경영한 미국인 여성 「손탁」도 평시에 그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다음은 총독 정치 치하에 중추원 찬의로 있던 윤치오 씨의 젊은 부인인 고려 여사이다. 미국 「워싱턴」여학교를 거쳐 동경 여자 학원을 마치고 합방 후에 돌아오자 그는 23세에 양심 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양심 여학교는 당시 신여성 교육기관이다. 그는 내가 다니던 소학교가 있는 교동에 살고있어 늘 떨떨거리는 쇠바퀴 인력거를 타고 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옷차림이 역시 앞서와 같은 19세기의 전형적인 「로맨틱·스타일」의 양장이었다.
가정 안에서는 안 그러했을 테지만 양장이 상시 외출복으로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한성판윤을 지낸바 있는 박의병씨 부인 유주경 여사 등이 간혹 그런 양장을 했다고 하지만 한국인의 양장이 워낙 흔치 않은 시절이라 구경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한 특수층의 극소수 여성을 제외하고는 일반 가정의 여성으로서 양장이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양장과 관련하여 서양식 「베일」을 쓰고 신식 결혼식을 맨 처음 올린 여성은 최활란씨로 알려져 있다. 「이화 70년 사」에 의하면 그는 1908년 제1회 졸업생으로 갓 스물이었다니까 그가 결혼한 25세는 1913년에 해당된다.
그때 옷차림이 「웨딩·드레스」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다. 하지만 연지 곤지 찍고 원삼 입고하는 구식과 달라 교회당에서 목사의 주례 하에 「웨딩·마치」를 울리며 「베일」을 쓰고 결혼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용기가 매우 필요한 일대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교회당 결혼식은 교인들로부터 「붐」을 이루어 대단한 인기였다. 금구 예식장이니 하는 직업적인 예식 장소가 생기고 예복 대여 점포가 생긴 것도 그런 시류를 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식 결혼식에는 난처한 희비극도 적지 않았다.
그때의 예식에서는 신랑·신부로 하여금 선서케 한 뒤 가족 및 축하객들을 향하여 『이 양인의 결혼에 이의가 없으십니까』하고 묻는 절차가 있었다. 그 주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의 있소!』하는 고함소리가 터졌다. 본처나 그 집안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항의하고 망신 주는 터였다. 그러면 어느새 나비 「넥타이」를 맨 「하이칼라」신랑은 멱살을 잡히고, 신부는 울고 불며 뛰쳐 도망치고, 심지어 아기까지 업은 본처가 길거리까지 따라나와 법석을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20년대의 웃지 못할 유행병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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