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구주|현장취재…70만 교포 성공과 실패의 자취|「스웨덴」서 존경받는 교포사회<스톡홀름=홍사덕 순회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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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심장 이식을 하든 조그만 부스럼을 떼어 내든 수술비는 1「달러」 40「센트」로 통일 되어있는 나라. 미국을 앞지르는 국민소득과『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감싸준다는 완벽한 사회보장제도의 나라. 「에덴」동산에 가장 가까이 가있다는 이 북국에도 한국인들은 어느 틈엔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연4만「달러」를 벌어들이는 의사, 세금만 2만「달러」씩 낸다는 무역상, 중앙 관서의 과장이 있는가 하면 「스웨덴」의 2대 교향악단에도 자리잡고 있는 등 『수입이 좋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종』에는 으례 한두 명의 한국인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스웨덴」의 한인 교포들이 수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현지 공관의 직원과 가족을 빼면 유학생 12명을 포함해도 50명이 채 안될 정도. 말하자면 소수정예의 교포사회인 셈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와는 반대로 신통치 못한 사람을 골라내기가 오히려 어려운 것이 이곳의 특정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한정우(43) 영우(38)씨 형제가 눈길을 끌었다. 동생인 영우 씨는 53년 서울의대를 1년만에 중퇴하고「웁살라」의대에 유학, 지금은 「스톡홀름」시 한복판에 『한 박사 병원』을 내어「스웨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의사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동생보다 6년 늦게 이곳에 온 형 정우씨도「스웨덴」사회복지사업의 중핵을 담당하는 『보험 및 주택조사 처』의 과장으로 발탁되어 「스웨덴」에서 가장 빨리 진출한 외국인 관리가 되었다.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영우 씨는 월4만「달러」를 벌어 3만「달러」룰 세금으로 내는 일종의 재벌의. 의사의 수입은 어느 나라에서나 최상급에 들기 마련이지만「스웨덴」에서도 이만한 수입을 올리는 의사는 다섯 명이 될까 말까 라고 한다.
한 박사는 한가지만도 어렵다는 전문의 자격을 가장 힘든 내과와 내분비과에서 두 가지나 획득하고「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사회의학을 도입, 외국인에게는 절대 허용하지 않던 대학강좌도 맡고있다.
68년「스톡홀름」시립병원의 내과 부과장으로 임명됐을 때는 「스웨덴」의협이 들고 일어날 만큼 파격적으로 빠른 승진을 했다. 한 때 이를 방해하려던 의협 측도 그의 탁월한 의술 앞에서는 항의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실력이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있는가는 그의 고객을 살펴보면 곧 이해가 간다.
「구스타프」왕의 의전실장이자 「스웨덴」의학계의 권위인 「라멜」남작은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의 진료까지 한씨에게 맡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왕 동생(작고)을 비롯, 상류사회 인사의 거의가 한 박사의 병원을 찾고 있다. 또 일본 「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 「이란」「에이레」등 「스웨덴」에 주재하고 있는 각 국 외교관과 가족들도 역시 한 박사의 고객이며, 「모스크바」에 있는 일본 대사관 직원들도 단골이다.
한 박사가 「스웨덴」인 뿐만 아니라 교포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65년이래 해마다 5천∼1만 「달러」 어치의 의약품을 본국에 희사 해왔다든가, 장학생을 데려온 일, 최근에 2세들의 교육을 위해 한글학교를 개설한 사실 등 한국인의 긍지를 가진 그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고있다.
한 박사 형제는 이처럼 애써 교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형제가 모두 금발의 부인을 맞았으므로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왕복 비행기 요금 외에 월1백60 「달러」를 지급하고있는 장학생에 대해서도 『「스웨덴」에서 결혼하지 않고 공부 끝나는 대로 꼭 귀국한다』는 조건을 붙여 놓았다.
이들 한씨 형제와 여러모로 대조적인 면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무역상 손인원씨(37)이다. 기자가 찾은「스톡홀름」교외의 호와 별장 촌의 손씨 집에는「손인원」이라고 한글로 쓴 문패가 의젓이 걸려있다. 응접실에는 청전의 동양화와 추사글씨의 탁본 등 한국고유의 물건들로만 장식돼있다.
책상 위에는 6권으로 된 족보가 펼쳐져 있었다. 손씨는 무역회사 사장이라 기보다는 무언가 선비 같은 체취를 느끼게 했다.
61년「스웨덴」인과 공동투자로 한국「스웨터」1천5백만「달러」어치를 수입, 사업의 첫발을 디딘 이래 10년만에 연2천만「달러」를 다루게 된 손씨는 고지식함과 정직으로「스웨덴」의 신임을 샀다고 말했다.
워낙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얄팍한 상술로 성공한다는 것은 못할 일이고, 혹 속임수라도 쓴다면 사업 계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받기 마련이라 했다.
손씨는 자신의 이와 같은 성공이 부인 김도혜 여사(30)의 뒷바라지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한다.
경기여고를 거쳐 이대 가정과를 나온 김 여사는 소설가 고 김래성 씨의 딸. 64년 결혼 직후「아파트」의 단칸방을 회사 사무실로 쓰던 어려웠던 시절에는 김 여사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살림 일체를 꾸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택군(7)과 미아양(2) 의 교육문제 때문에 머지않아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대로 있다가 2세들이 모두「스웨덴」인 화되어 버릴 것을 생각하면 생활이 좀 못해지더라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 같다는 얘기다.
한씨 형제와 손씨 부부 외에도「스웨덴」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한국인은 많다. 왕립 교향악단의 제1「바이얼리니스트」로 활약하는 임유직씨(33), 「스톡홀름」 교향악단의 이희춘씨(30·바이얼린), 의사로는 조장원·한기직·신현덕씨 등이 이미 상당한 기반을 굳히고 있으며 「스톡홀름」대학 물리학 연구실에 있는 조장희 씨는 「스웨덴」물리학계의 유망주로 손꼽히고 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편 잃어버린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다. 이들은 약 8백30명의 입양호아로 거의 걸음마도 배우기 전에 왔기 때문인지, 피부와 눈 빛깔에서만 한국을 간직하고 있을 뿐 언어·사고방식·조국애가 모두 「스웨덴」에서 맴돌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들과 만나보려는 시도는 양부모의 거절로 번번이 실패했다. 현지 대사관의 설명으로는 지난해 이곳에 공관을 설치한 북괴가 한국 고아의 입양을 인신매매라고 헐뜯었기 때문에 양부모들이 몹시 화가 나있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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