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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탐구] 문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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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문구산업이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문구는 1980년대 중반까지 '국산품 애용'이라는 우산 아래서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후 국내 문구 수요가 급격히 줄고, 해외시장도 경쟁이 날로 치열해졌다.

독일.일본 등은 고급 브랜드를 앞세워 격차를 벌리고 있고, 중국.필리핀 등은 저가 제품으로 맹렬하게 추격해와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이다. 문구업계는 국산 캐릭터 개발과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대형점.할인점이 판도 바꿔=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 문구골목. 신학기를 앞두고 이 곳의 50여개 문구 도매점에는 학부모.어린이들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상인들은 영 신통치 않은 표정이다.

'예지사'의 오세인(50)사장은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대량으로 물건을 떼다가 동네장사 하는 소매상이 찾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유치원.학원 관계자, 일반 고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吳사장은 이어 "요즘은 하는 수 없이 일반 고객에게도 소매상과 마찬가지로 40% 정도를 할인해 팔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사정은 남대문.영등포.천호동 등 다른 도매시장도 비슷하다.

다양한 상품을 갖추는 데 어려움이 많은 동네 문구점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현재 전국의 문구 소매점은 2만6천3백여개를 헤아린다.

그러나 업계에선 2005년까지 25%가량이 문을 닫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프랜차이즈.대형 문구점.할인점 등이 시장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하면서 동네 문구점이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문구점의 경우 알파유통이 전국에 3백개 체인점을 확보하고 있고, 모닝글로리.영아트.아트박스.드림오피스 등이 1백50여개 안팎의 점포를 갖고 있다.

또 1백~3백평 규모의 대형 문구점도 전국에 1백개를 넘는다. 9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온라인 주문.판매 업체도 현재 30여개가 성업 중이다.

이에 따라 문구 제조업체들도 도매점 공략 일변도에서 벗어나 대형점.할인점과 직거래를 늘리고 있다. 유통단계 축소로 기업은 물류 비용 부담이 줄고 소비자 가격도 아울러 낮아지고 있다.

◇토종 캐릭터 개발이 숙제=문구산업의 연간 내수.수출 시장 규모는 약 2조5천억원. 이를 놓고 1천여개의 중소업체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생산 품목은 1만종이 넘는다.

문구조합 김수철 전무는 "볼펜 팁(끝 부분)을 만들려면 1천분의 3㎜의 정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 첨단기술이 필요하지만 전자복사용지 등은 특별한 기술 없이도 생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상품 가격도 몇십원짜리 지우개에서부터 몇십만원을 호가하는 만년필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문구업계는 요즘 고민이 많다. 출산율이 떨어져 주 고객인 어린이 숫자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교의 공부 방식이 외우고 쓰는 것 일변도에서 토론 위주로 바뀌면서 필기구.노트의 수요가 감소해 업체들은 울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컴퓨터 사용이 늘면서 복사용지나 잉크 카트리지.토너 등의 새로운 시장이 생겨나 위안이 되고 있다. 국내 문구 제품의 품질은 세계시장에서 중상위권으로 분류된다. 특히 모나미.동아연필.모닝글로리.피스코리아 .칸나.한국빠이롯드만년필 등은 전통적 문구류로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했다.

문제는 브랜드 파워다. 몽블랑.파카 등 세계적인 명품은 물론 펜텔(일본).마페드(프랑스).파버카스텔(독일) 등의 인지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산 캐릭터를 개발하는 것도 숙제다.

문구 매출은 어떤 캐릭터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인기 캐릭터인 포켓 몬스터.햄토리.헬로 키티.미키 마우스.해리포터 등은 대부분 수입된 것이다.

이같이 외제 캐릭터가 판치는 와중에서 일부 업체는 자체 캐릭터를 개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모닝글로리의 '블루 베어', 미스터케이의 '콩콩이', 둘리나라의 '둘리'등은 토종 캐릭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채윤경(계원조형예술대)교수는 "수입 캐릭터를 독점 사용하기 위해 국내 업체끼리 경쟁을 벌이는 사이에 로열티만 치솟아 외화 유출이 심해지고 있다"며 "편협한 지역색을 띠지 않으면서도 개성이 강한 토종 캐릭터 개발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현지화로 승부 걸어=문구업계는 70년대 초반부터 수출에 눈을 돌렸다. 좁은 내수 시장보다는 넓은 해외시장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구 수출액은 5억1천만달러로 77년 3천9백만달러의 13배 규모다. 수출 주력 품목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했다. 60년대는 연필, 80년대 중반까지는 앨범이 선도했다. 이후에는 필기구류.금속 문구류.노트 등의 지제(紙製) 문구류 등으로 다변화했다.

앨범은 80년대 중반 6천만달러 이상 수출돼 세계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EC 시장에서 잇따라 반덤핑 판정을 받아 크게 위축됐다. 또 중국산 등의 저가품에 밀려 지난해 수출액은 2천4백만달러에 그쳤다.

문구업계는 중국산 저가품의 공세를 막는 것이 발등의 불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 중국산은 학용품 분야에서 국내시장의 20%(약 1천억원 규모)를 차지하며 급속히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알파유통 이동재(56)회장은 "중국산 학용품은 아직 품질이 낮아 국산품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지만 국내 기업이 품질 고급화에 더 신경쓰지 않는다면 완구와 같이 몇년 안에 시장을 통째로 내줄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한편 문구업계는 중국 등 해외공장 설립에 열성을 보이고 있다. 인력난과 고임금 등으로 국제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현재 외국에 생산기지를 갖고 있는 업체는 40여개다. 이 가운데 중국에 30개가 몰려 있다.

진성상역의 경우 중국.필리핀.미국 등에서 앨범을 생산해 연간 3천5백만달러의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스테이플러 생산업체인 피스코리아도 미국.멕시코.중국 등 세곳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고, 모나미는 태국과 중국 상하이(上海)공장에서 연필.크레파스.물감 등을 생산하고 있다. 한국빠이롯드만년필이 70년 설립한 태국법인은 현지 문구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뿌리를 내렸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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