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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중앙시평

국정원 개혁, 대통령이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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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1974년 12월 22일자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는 전 세계를 뒤흔들 만한 특종이 장식했다. 베테랑 탐사보도 기자인 세이모어 허시가 닉슨 행정부 시기 미 중앙정보국(CIA)의 비밀공작을 폭로한 것이다. 당시 CIA가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을 불법으로 도청·감시해 왔고, 피델 카스트로 등 여러 외국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도 진행했다는 내용이었다.

 파장은 엄청났다. 미 상원은 프랭크 처치 의원을 위원장으로 민주·공화 양당에서 각각 4명씩 참여하는 ‘처치 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이 위원회는 연방정부 산하의 정보보안기구가 저지른 ‘불법적이고 부적절하며 비윤리적인’ 활동의 실체를 철저히 규명하고 그 결과에 입각해 정보기관을 개혁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66일간 총 70여 명의 증인을 소환해 강도 높은 청문회를 진행한 위원회는 무려 5만 페이지에 달하는 14권의 보고서를 펴냈다. 행정부도 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보고서가 나온 직후인 76년 2월 18일 포드 대통령은 정보기관의 전반적인 개혁과 해외 정보활동에 대한 대통령 감독 강화, 외국 지도자에 대한 암살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행정명령 11905호를 발동했다. 의회 또한 ‘해외정보감시법’(1978)을 만들어 법원 허가 없이 자국민을 감시하거나 감청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처치 위원회의 사례는 정보기관 개혁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특히 입법부가 개혁작업의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점이 그렇다. 민주·공화 양당의 대표들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진실규명에 매진했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정보개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53일간의 국정조사 기간 동안 이전투구로 일관하며 겨우 기관보고 3회, 청문회 2회 개최에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채택하지 못한 우리 국회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엄격한 진상규명 없이 설득력 있는 개혁안이 나올 리 만무하다. 국정원이 만들고 있다는 이른바 ‘셀프 개혁안’만 봐도 그렇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북업무를 1차장 산하로 옮기고 3차장을 과학기술 전담으로 개편하는 한편 정당·언론사·민간기관 출입 제도를 없애고 직원들의 정치불개입 서약을 받겠다는 게 개혁안의 골자다. 게다가 국내파트는 오히려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 작업을 과연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간 논란이 된 국정원 문제의 본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정부 비판 세력을 종북 성향의 대공용의자로 짜맞춰 수사하거나 심리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국내보안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일들이 국정원법 3조 1항이 규정하고 있는 ‘대공, 대정부 전복(반체제), 방첩, 대테러 및 국제 범죄조직’에 대한 정보·수사활동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가령 국정 전반을 모니터링하거나 ‘댓글달기’ 정치개입을 일삼는 건 어느 잣대로 봐도 탈법적 행위다. 이러한 본질을 회피한 ‘셀프 개혁안’을 과연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는가.

 야당 측이 내놓은 개혁안도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다. 국내보안 기능은 검찰이나 경찰에 이관하고 해외 및 대북 업무만 전담하는 가칭 ‘통일해외정보원’을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자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해외정보기관을 총리 산하에 둔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데다 현행 법체계 하에서는 대공수사권을 검경에 넘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외사방첩이나 대테러, 국제범죄, 사이버안보 등은 해외와 국내를 아우르는 융합형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이를 기계적으로 분리한다는 건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두 개혁안 모두 합리적 대안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서두른다고 개혁의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현시점에서는 국정원이 만든 ‘셀프 개혁안’을 심의, 검토할 대통령 직속 ‘국정원 개혁위원회’를 한시적으로 구성하는 게 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초당적이고도 거국적인 틀을 만들어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가 추천한 인사까지 포괄하는 방식이다. 이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이 최종안을 만들고 대통령은 이를 국회에 제출해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수순이면 적절할 듯하다. 이 과정에서 야당 의견도 충분히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정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갈등과 이견을 아우르는 중재자, 개혁작업의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편협한 이해관계의 틀을 넘는 통 큰 접근만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국정원 개혁의 첩경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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