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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이웃, 고약한 이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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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독일 베를린에 출장 가면 하루에 한두 번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대학살 추모관)과 마주친다.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시내 중심부에 있어 오며 가며 지나치게 된다. 2711개의 제각기 높이가 다른 잿빛 직육면체 콘크리트 더미들(가로와 세로의 길이는 2.38·0.95m로 모두 동일)이 담벼락도 없는 축구장 세 배 규모의 부지에 놓여 있으니 눈길이 안 갈 수 없다. 볼 때마다 수도 한복판에 공동묘지를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반성의 공간’을 만든 독일인들의 과감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독일 연방정부는 20일째 표류 중이다. 지난달 22일 총선을 치렀으나 아직 새 정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과 연립정부 구성을 타협 중이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올해 말까지 새 정부 출범이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런데도 독일 안이나 밖에서 걱정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올해 초 이탈리아 총선 뒤 두 달간 정부가 꾸려지지 못해 너도나도 경제 붕괴 위기를 논하던 때와는 딴판이다. 좌우 대연정을 하겠다는데도 정치적 불안을 예상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3년 전 영국에서 우파 보수당과 중도 자유민주당이 연립정부를 만들었을 때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아우성이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 두 달 뒤인 2011년 5월 독일 정부는 원전 폐기를 선언했다. 총 17기 중 지금까지 8기의 가동이 중단됐고 2022년까지 나머지도 문을 닫는다. 약 2년 새 전기 요금이 10%가량 올랐지만 원전 정책을 재고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이는 별로 없다. 위험 부담을 줄이려면 모두가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한다는 상식이 통한다.

 프랑스와 영국에 독일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부활했다. 유로존 위기 때마다 수습의 칼자루를 쥐는 데서 드러나듯 이미 유럽의 경제적 패권은 독일로 기울었다. 자국 철학자가 ‘독일이 유럽화되는 대신에 유럽이 독일화되는’ 현상을 걱정할(『독일의 유럽(German Europe)』, 울리히 벡) 정도다. 정치적·사회적 안정성도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늘 차분하게 실속을 챙긴다. 영국·프랑스가 달라이 라마 때문에 중국과 교역 마찰을 빚는 동안 독일은 조용히 중국 지도부를 초청한다. 가끔씩 이웃 나라들이 들춰내는 ‘전쟁의 원죄’도 스스로 더 가혹하게 다루면서 면박 주기 카드로서의 효용성을 없애버렸다. 체격 좋고 집도 부유하고 과거의 폭력 습관까지 깔끔하게 버린 최우등생이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늘 옆집에 불편을 끼치는 고약한 이웃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다행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옆에 종군위안부 피해자 추모관을 만들고, 총리가 제암리 교회를 방문해 희생자 후손에게 무릎을 꿇고, 자국과 주변국의 피해를 걱정해 원전 폐기를 결정하는 모범국이 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섬뜩하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