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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사랑도 타락으로 몰아가는 그곳 거기서 여성으로 일어서는 것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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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허지은 옮김, 문학세계사
628쪽, 1만 6800원

이란의 여성작가 파리누쉬가 쓴 이 책은 600쪽이 넘는 두툼한 소설책이다. 현대 이란 소설을 읽을 기회는 드물다. 기대감이 컸다. 플롯이 단순하고 복선도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흡인력은 대단했다.

 때는 1979년, 장소는 왕조의 붕괴와 호메이니 혁명정부의 집권으로 혼돈에 빠진 이란의 테헤란. 작가는 이것을 후경으로 놓고 한 여자가 겪는 운명, 즉 인도 영화 같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604쪽) 같은 삶의 여정을 주르륵 펼쳐 전경화 하는데, 중간에 읽기를 그만둘 수 없을 만큼 이야기의 힘으로 생동한다.

 마수메는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다. 히잡을 쓰는 마수메는 “늑대들이 득시글거리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애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오빠와 남동생의 감시 아래에 있다. 16세 소녀는 첫사랑을 만난다. 이것은 자연스런 생명의 충동인데, 혹독하고 기구한 운명의 시작점이다. 첫사랑을 타락으로 매도하고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주장하는 오빠들의 뒤틀린 행태는 이란 사회 저변에 퍼진 남성 폭력의 한 모습이다.

 작가는 이 연약한 여성이 남성지배 사회의 인습과 전통에 짓눌리고, 종교적·사회적 편견과 몰이해에 어떻게 희생당하는지를, 그럼에도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저와 가족을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를 연대기적 순서로 적는다. 여자는 원치 않는 결혼, 혁명조직에 가담한 남편의 투옥과 처형, 두 아들에게 닥치는 시련들을 차례대로 겪어낸다.

 소설 시작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다. 후반부에서 작가는 여린 여성이 ‘반역자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냉대에 맞서고 남편을 빼앗고 자식마저 삼키려는 집단의 폭력에 맞서 뱀같이 지혜롭고 전사와 같이 강인한 내면을 갖게 되는지를 묘사한다.

 여성은 가족 내부와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다. 배울 권리, 사랑할 권리를 짓밟는 폭력은 이란 여성들이 일상으로 겪는 현실이다. 마수메는 여성 억압적인 현실에 눈뜨면서 인습과 도덕의 껍질을 찢고 스스로 진화한다. 또 다른 여성들, 파르바네와 샤흐자드는 이란 사회의 구태와 완고함을 무찌르고 권리를 쟁취하는 여성들의 의식 변화를 드러낸다. 그들은 여성을 옥죄는 주류적 관습과 도덕 따위와 상관없이 개방적이거나, 인간의 운명이 자신의 주체적 선택과 의지의 영역에 있음을 급진적인 행동과 모험으로 보여준다.

 인상적인 구절 하나. “아들을 기르는 것은 가지를 튀기는 것과 같아서 기름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나중에 더 많은 기름으로 갚아준다.”(574쪽) 이란의 어머니들은 아들에게 더 많이 베푸는데, 이는 노후를 아들에게 의탁하기 때문이다. 마수메는 자립적인 여성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아. 고생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거야. 아이들을 기르는 건 의무였으니까.”(574쪽)

 이렇듯 『나의 몫』은 제 운명을 피동적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하고, 생명을 으깨고 부수고 삼키는 악과 맞서 승리한 모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한 자립적인 여성의 이야기다.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와 문학평론을 써왔다.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삶을 꾸려가고 있다. 저서 『일상의 인문학』 『철학자의 사물들』 『마흔의 서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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