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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학도 의용군(8)-이북선무(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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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학도의용병의 전국적 조직으로는 「학도의용대」가 있었다. 6·25 직후에는 각 중학이나 대학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몇명씩 집단으로 군문으로 들어갔지만, 그후부터는 몇갈래의 조직을 통해 참전하다가 끝내는 「학도의용대」가 학생들의 전쟁 참여를 거의 도맡아 관할했다. 이 동안에 학생 단체끼리 어느 정도의 알력과 불화가 있었던 것은 이미 기술 한대로다.
학생들의 참전에는 국방부 정훈국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다. 주무부인 문교부가 이렇다 할 기여를 못한 것은 전시 계엄령 하인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학도의용대」와 정훈국 당사자의 총괄적인 이야기를 간단히 듣고, 「대한 학도의용대」 업적의 도미를 장식한 「이북선무」 공작을 중심으로 증언을 전개해 보겠다.

<신분증 10만장 이상 발행>
▲손도심씨(당시 서울 문리대 재학=대한 학도의용대 중앙본부장·전서울신문 사장·현사업·52) 『나는 처음에 부산에서는 「대한 학도의용대」의 고문으로 일을 했어요. 부산에는 심영택군이, 그리고 대구에는 김득신군이 「학도의용대」를 조직하고, 때로는 서로 중앙 본부라고 다투기도 했어요. 수복후인 1950년 11월에는 내가 중앙 본부장이 돼 각도별로 지부를 두고 정훈·선무 활동을 벌였죠. 북진 때에는 이북 각도에도 국군 뒤를 따라 선무반을 파견했읍니다.
평안도는 김재순, 함경도는 도헌양·양병후, 황해도는 장현서·김상섭, 강원도는 이수고제씨가 각각 30명 내외씩 선무반을 인솔하고 들어갔죠. 또한 대원중 9백50명을 선발해서 「유엔」군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은 일본에 가서 훈련을 받고 인천 상륙 작전에 참가했지요. 황근옥(단대) 김학실(숙대) 이인세(사대부중)양 등 여학생들도 상당수가 참여해서 남학생과 함께 활약했어요. 1·4후퇴때 여학생들은 대구까지 같이 내려와서 합숙을 하며 장병 위문과 간호 활동을 했죠. 또한 772·773의 정훈 부대에 편입되어 후방 지역의 선무와 공비토벌도 했고요. 6·25동란중 「학도의용대」를 통해 군문에 들어간 학생은 13만 정도가 됩니다.
정훈국으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선근씨(당시 국방부 정훈국장·현 영남대학총장·66) 『확실한 숫자는 모르지만 학도의용병으로 나가 희생된 학생이 2만은 될거예요. 워낙 급한 때여서 군번도 없이 전사한 학생이 많아 지금 우대를 해주려야 할 수가 없어요. 수원서 내가 비상학도대 2백여명을 조직한 것을 비롯 대전 대구에서 정훈국이 학생을 계속 모집했어요. 그 때 문교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 못해 정훈국이 도맡은 거지요.
대구서는 여러 학교를 찾아가 호소도 하고 피란 온 학생들을 흡수해 단기 훈련을 시켜 각지방의 선무 공작원 또는 일선 전투 요원으로 보냈읍니다.
후방의 보초 근무도 세우고요. 여하튼 정훈국장 명의로 학도의용대에 신분증을 내준 것이 10만장을 넘습니다.』

<졸업장 갖고 부모 만나러>
▲김종양씨(당시 연대재학=대한 학도의용대원·현새한상사 사장·42) 『나는 단신으로 월남해서 공부하다가 6·25를 당했는데 수복 후 「학도의용대」에 들어갔읍니다. 청계국민학교에서 이북 파견을 위해 5백여명이 1주일 동안 훈련을 받았지요. 나는 황해도가 고향이어서 그곳으로 가기를 지원했어요.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부풀더군요. 부모님과 친구에 자랑하려고 용산중학 졸업장까지 안주머니에 넣고 기다렸죠.
드디어 10월 28일에 3명의 여학생을 포함한 28명의 우리 황해도 파견 대원은 정훈국에서 간단한 선서식을 하고 서울을 출발, 임지로 향했죠.
걷기도 하고 「히치하이킹」도 하면서 해주에 도착했어요. 원주민들이 쌍수를 들고 열렬히 환영해 주더군요.
성대한 환영 「파티」도 열어주고요.
나는 대한민국 헌법을 가르치기로 돼 있었어요. 학교는 모두 문을 닫고있읍디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교원을 모두 모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이들의 사상 조사를 하고 한 학교에서 3명씩 해주 공전에 집합시켜 헌법·역사 등을 가르쳤습니다. 모두 열심히 듣고 배우더군요. 현지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조직시켜 여학교에 데려다가 우리 여대원들이 애국가와 군가를 가르쳤지요.
밤에는 자치 대원들과 합동으로 거리를 순찰하면서 치안도 확보하고요.
하루 저녁엔 방송을 들으니까 국군이 후퇴한다는 거예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해주 시내에 주둔하던 「필리핀」 군대가 싹 나가버립디다. 우리 대원들은 우선 긴급회의를 열고 우선 3명의 여자 대원을 먼저 보내기로 했어요. 여자 대원이 간후 우리 남자들은 끝까지 남아서 버티어 보기로 했습니다. 시민들이 우리를 불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체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영웅심도 발동이 돼서 후퇴할 수가 없게 된거지요. 이러다가 우리는 해주 시내에 꼭 갇히고 말았어요. 이 무렵에는 미군기가 와서 막 폭격을 하고요.

<사이원서 적 게릴라에 피격>
우리는 광목에다 영문으로 「대한 학도의용대인데 이선근 정훈 국장에게 알려다오」라고 써서 흔들어 댔어요. 미군기는 그냥 가 버리고 맙디다. 이 때 우리 본부는 도청 숙직설이었는데 하룻밤에는 사이원쪽서 낮에 잠복해 들어 온 적 「게릴라」들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어요.
이날이 12월 21일인데 나는 대원 임영군과 현지 학생 1명을 데리고 해주 앞산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본부 대원들이 적의 기습 공격을 받고 용당포로 빠져나간 것을 몰랐어요.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나길래 본부로 달려갔더니 대원들은 이미 해군 초계정을 타고 막 떠나 버렸어요. 사태가 그만큼 급했으니까 본부 대원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거지요. 무엇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슬픈 것은 그 동안 부모님도 못 만나 뵌 거예요. 해주서도 한백리 더 떨어져 있어 차일피일하다가 고향에도 못가봤어요. 그렇게 빨리 후퇴할 줄은 몰랐거든요. 부모님께 보이려던 용중 졸업장은 끝내 안주머니에서 햇빛을 못보고 말았지요.
할 수 없이 우리셋은 육로로 후퇴하기로 하고 철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죠. 영양 비행장을 지나다가 적의 추격을 받았지만 간신히 빠져 나와 38이남의 한 어촌에 도착했읍니다. 우리는 이때까지도 총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어촌의 자치 대원들이 총을 달라는 거예요. 안된다니까 다수를 믿고 위협하길래 공포를 쏘며 길을 뚫고 나왔죠. 임진 강가에 오니 수만의 피란민이 몰려 있는데 강 건너편에서 미군이 공포를 쓰면서 못 건너가게 해요. 나는 마침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얼음 위를 건너갔지요.
미군에게 대원 2명의 도하를 사정해서 모두 건너왔는데 그후 피란민들도 몇명씩 나누어 다 오긴 왔어요. 이날이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여서 우리셋은 미군 막사에서 칠면조를 얻어먹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총은 미군에 빼앗겼어요. 오열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거지요. 이튿날 미군 「트럭」을 타고 서울에 왔읍니다.
학도의용대 본부를 찾아가 보니까 내 이름과 임영씨 이름은 빨간줄로 지워 놓았어요. 죽은걸로 간주한거지요.
낯모르는 사무 보는 자가 식권 3장을 주면서 가서 밥이나 먹고 갈데로 가라고 합디다. 화가 났지만 꾹 참았지요. 나는 여기서 나와 미군 부대 통역으로 들어가 버렸읍니다.』

<중공군 모자 썼다 봉변 당해>
▲김상섭씨(당시 단대재학=학도의용대 황해도 파견 부대장·현창경원「케이블·카」사장·45)『7월말께 학도의용대 양산 지대장으로 대구서 내려갔습니다. 양산농업학교에 본부를 설치하고 대원을 모집했는데 1차에는 20명밖에 안모였지만 2차에는 4백여명이 모였어요. 부상한 현역 대위 한사람이 와서 훈련을 담당했어요. 며칠씩 간단한 집총 훈련을 마치고는 대학생은 동래보병학교로, 중학생은 하사관학교로 보냈지요.
이때 밀양에도 밤엔 적 「게릴라」가 가끔 출몰해서 우리 학도의용대는 군과 함께 이를 색출하기도 했습니다. 각군·면에도 연락처를 두고 10월 중순까지 계속 학도의용병을 모집하다가 하순에 양산 지대를 해체하고 서울로 왔지요. 즉시 학도의용대 황해도 파견부대장으로 갔습니다. 해주에서의 일은 김종양씨가 자세히 이야기했으므로 중복을 피하고 나는 「에피소드」 한가지만 말하겠어요. 12월 중순쯤 하루는 해주시 교외를 순찰하다 보니까 중공군 「지프」가 한대 전복돼 있습디다.
어떻게 해서 그 「지프」가 거기까지 와서 뒹굴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적으로 보아 중공군 수색대가 여기까지 벌써 오기에는 이르거든요. 차내에는 아무 것도 없고 두툼한 중공군 털모자가 하나 있어요. 하도 날씨가 춥길래 그 모자를 쓰고 다녔죠. 처음에는 우리들끼리 서로 잘 아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시장에 갔을 때 들통이 났습니다. 이때 해주에는 「필리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자들도 시장에 나왔다가 나와 부닥쳤어요.
5, 6명이 일제히 나한테 총을 들이대며 영어로 「너 중공군이진 하고 다그쳐 묻는거예요. 「노」라고 했더니, 내 모자를 가리켜요. 그제서야 그자들이 왜 총을 들이댔는가를 알겠더군요. 같이 간 대원과 함께 「학도의용대」 증명서를 내보이고 손짓 발짓으로 해명을 해 오해는 풀었지요. 나는 그 자리에서 중공군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동댕이치고 짓밟아 버렸습니다. 12월 21일밤에 잠복해 들어 온 적 「게릴라」의 기습을 받았어요.
상황이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대원과 한께 용당포로 후퇴했습니다. 마침 우리 해군 초계정이 지나가길래 사정사정해서 타고 인천으로 내려왔죠. 12월 22일에 서울 학도의용대 본부로 돌아왔읍니다.』
※정정=본 연재 150회 본문 기사 중 「문상명」 소령을 「문상명」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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