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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끌어모았지, 그림공장 같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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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삼각지 화랑거리는 1950년대 미군 초상화 판매로 시작해 60~70년대엔 수출용 그림인 ‘쫑쫑이 그림’으로 호황을 누렸다. [김상선 기자]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허름한 화랑. 진득진득한 유화물감 냄새가 가득 메웠다. 오래된 라디오에선 가수 배호가 부르는 ‘돌아가는 삼각지’가 흘러나왔다. 머리 희끗한 노화가의 붓 끝이 노랫가락을 따라 휘감기더니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꽃’이 재현됐다. 청록빛 바탕에 흰 꽃나무가 흐드러진 원작과 같은 듯 다르다. 모작(模作)이 좀 더 화사하다. 예본화랑 최진홍(64) 대표가 시작한 지 나흘 만에 완성한 것이다. 실내에 놓인 소형 TV에선 최 대표가 한 달 전에 그려 납품한 또 다른 그림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자동차 광고가 나오고 있다. 역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이다.

 최씨의 화랑이 있는 삼각지는 한강·서울역·이태원 세 방향으로 통한다. 한강로 도로변엔 화랑, 화실, 액자가게 등 60여 곳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삼각지 화랑거리’로 불린다. 정착한 화가 대부분이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전업 화가다. 1950년대 6·25전쟁으로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자 삼각지로 모여들었다. ‘로타리 화방’ ‘파리 화방’이 시초다. 이들은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번 돈으로 생활했다. 한때 수백 개의 상점이 들어섰다. 미8군 PX건물 초상화부에서 일한 고(故) 박완서 작가가 “박씨” 하던 박수근 화백도 이곳을 거쳐갔다. 미군 ‘별’들은 여전히 단골이다. 최씨는 4년 전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가족들의 초상화를 모두 그려줬다. 그는 “사단장이 바뀔 때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와 달러 뭉치와 바꿔갔다”고 회상했다.

 60~70년대 미군이 대거 빠져나가자 수출용 그림인 ‘이발소 그림’이 대세를 이뤘다. 동네 이발소에 걸려 있던 외국 명화(주로 풍경화)를 베껴 대량 생산한 뒤 미국 등에 수출한 것이다. 당시 삼각지는 그림 공장 같았다. 물감을 쫑쫑 찍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일명 ‘쫑쫑이 그림’)에 천만 둘러서 내보냈다. 당시 ‘아메리아’ 등 대형 그림 수출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돈벌이가 되자 여기로 몰려와 정착했다.

 그중 한 명인 김수영(65) 열린화랑 대표는 “쫑쫑이 그림을 할 땐 주머니 사정이 정말 괜찮았다”며 “하루에 40장도 그렸는데 장당 3000~2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80년대 들어 그림 수출은 인건비가 싼 중국과 동남아에 주도권이 넘어갔다. 삼각지 화가들은 수출 공신이지만 삼각지 출신이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다. 김씨는 “미술대전에 도전해 세 번 입상했는데도 싸구려 미술을 했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고 털어놨다. 최종도(57) 작가는 13년 전부터 소나무만 그린다. 작품은 호당 5만~10만원에 팔린다. 그는 “여기 화가들도 자기만의 화풍을 개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삼각지 작품을 취급하는 광주·부산 공항갤러리 컬렉터 이용건씨는 “생산이 빠르고 디테일이 강한 삼각지 작품은 가격 부담이 적은 상업미술로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삼각지 화랑거리는 지금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이우승 삼각지화가협회장은 “미술과 전쟁의 역사가 숨쉬는 삼각지를 중국 베이징 789예술거리처럼 관광 상품화하고 상업미술의 산실로 키워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주혁 용산미술협회장은 “화가들의 공동 작업과 전시, 판매까지 가능한 용산국제미술비즈니스센터 설립을 서울시에 건의 중”이라고 밝혔다.

글=이지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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