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제7화 양식반세기(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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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열차식당 웨이터>
1933년2월에야 정식으로 「웨이터」가 된 나는 안동·신의주뿐만 아니라 청진·나진·부산 등을 오르내리며 양식을 「서브」해왔다. 견습 딱지는 떨어졌어도 일본 사람은 2원씩 받는 일급을 나는 한국사람이라 하여 절반쯤밖에 받질 못했다. 간혹 실수가 있으면 「센징」(조선사람)으로 몰아세워 복받치는 설움을 꾹꾹 참아야 했다. 당시의 「웨이터」장은 일본인 「자마겐로꾸로」로 그 밑에 영어 잘하는 한국인 강흥선씨가 있었는데 「웨이터」장은 「웨이터」세계에서 대통령 격이라 「웨이터」의 서슬이 여간 시퍼렇지 않았다.
강씨는 내가 50전(일급)받을 때 1원50전을 받고 「팁」은 1백원이 넘었다. 「웨이터」장 보라 할 수 있는 강씨는 1주1회씩 강좌를 벌이고 『고객들의 개성은 백인백색으로 개성에 맞춰 가려운 곳을 긁어 줘야하며 손님의 일거 수를 살펴 즉각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당시에 「디너」먹기 전 「칵테일」은 「맨해턴」과 「마티니」가 대유행이었고 여자들은 「밀스」라는 프랑스 포도주를 찾는 빈객들도 많았고 어떤 이들은 식탁에 병째 얼음에 재워 두고 마셨다. 웨이터들은 손님 등 뒤에 석자세치 물러서 있다가 손님의 잔이 빌락 말락 하기가 무섭게 잔을 채워줬다.
총독관저에서나 정무총감저택(현 「코리아·하우스」자리) 등 거물급 「파티」가 열리면 열차식당에 근무하다가 뻔질나게 불려가서 출장「서비스」를 해왔다. 서슬 퍼런 총독이나 정무 총감저택에 흰 저고리만 입으면 「프리·패스」를 시켰다. 한번은 조선호텔에서 총독이 수풍「댐」과 흥남 질소비료공장, 반도「호텔」을 지은 수력 전기왕 「노구찌」의 환영연을 벌였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분위기에 압도된 「웨이터」가 「코피」잔을 든 손이 떨려 축사를 하려 일어나던 총독의 뒤통수에 뜨거운 「코피」를 끼얹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황한 경찰관과 경호관들이 「웨이터」를 끌어다가 묵사발을 만들려는 찰나 총독은 「코피」에 젖은 「턱시도」(예복)를 툭툭 털며 『웨이터를 놔줘라. 이왕 「코피」를 마실 바엔 이렇게 철저히 마셔야지』라고 말해 「웨이터」는 위기일발에서 벗어났다. 양식이 처음 보급될 때는 「테이블·매너」(식탁법)가 까다로와 외국에 다녀온 사람으로 고객이 한정됐었거니와 지금 생각하면 배꼽을 쥘만한 일들이 많았다. 해방 전만 해도 「프랑스」식 양식이 많아 간편한 미국식과는 달리 까다로왔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일류라는 조선호텔 그릴에 점잖게 자리잡은 7명의 신사들이 「디너·A」를 주문했다.
먼저 「핑거·볼」(finger bowl)을 식탁에 갖다놨더니 그중 상석에 앉은 모인사가 「핑거·볼」을 두 손으로 들더니 쫙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핑거·볼」은 식전식후에 손가락을 닦으라고 떠다놓은 손 씻는 물인지라 「웨이터」도 당황했고 「핑거·볼」이 무엇인가 잘 아는 나머지 6명의 인사들은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하는 수 없이 기지에 넘치는 좌중의 한 신사가 자기 상관이 당황할까봐 자기도 「핑거·볼」을 번쩍 들어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뒤 따라 나머지 인사들도 쫙쫙 들이켜 손씻는 물을 순식간에 말려버린 소극이 벌어졌다. 청춘 남녀가 양식집에 들어왔다가 주문을 못하고 쩔쩔맨 끝에 청년이 『「웨이터」, 「메뉴」좀 갖다주시오』했더니 숙녀가 얼른 『나도 메뉴로 들겠어요』라고 했던 이야기도 이 무렵에 나왔다.
그러기에 어떤 양가집에선 양식집에 자녀를 데리고 와서 양식 먹는 법을 교육시키는 광경도 있었다. 「앵글로색슨」들은 음식 먹을 때 소리를 내면 질색이라면서 음식을 입에 넣고 소가 여물을 씹듯 우물우물 씹으라고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식후에 나오는 과일도 한꺼번에 다 먹으면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 과일 한쪽만 씹고 껍질 쪽은 물려야 양식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 했다.
「디쉬」(접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쓸어 넣으면 식사가 끝났다는 신호이므로 「웨이터」가 얼른 접시를 치우자 『「웨이터」! 아직 먹지도 않은 고기를 가져가느냐』고 호령하는 사람이 있었던가하면 수줍어 말도 못하고 조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쿠키」로 배를 채웠다는 신사도 있다.
먹는 것도 어렵거늘 「서브」하는 「웨이터」들은 더욱 어렵다. 우리가 배울 땐 음식은 손님의 왼손 쪽으로 드나들고 물은 손님의 오른손 쪽으로 나르라 했다. 「수프」도 요리에 속하니까 왼쪽으로 날라야하는데 물(수)에 속한 줄 알고 오른쪽으로 나르다 벼락을 맞은 적도 있었다.
당시는 양식인구가 서울인구를 50만으로 잡고 줄잡아 5천명(1%)으로 잡았는데 상식 양식인구는 5백명이라고 일인들이 자료를 뽑아놓고 있었다. 한정된 양식장이들의 「테이블·매너」는 좋은 편이었다.
양식 반세기에 있어 가장 잊혀지지 않는 희비극 중의 하나는 어떤 「레스토랑」에서 「나이프」를 잘 들라고 숫돌에 어찌나 갈아 맸던지 손님이 고기를 썰어 나이프째 입에 넣다가 입술을 뺀 일이 있었다. 마주 앉았던 손님이 당황하여 『피가 흐릅니다』고 말하자 잘 드는 칼을 쥔 신사는 짐짓 『아니요, 나는 워낙 거기를 「레어」(거의 생고기처럼 살짝 군 것)로 먹기 때문에 피가 뚝뚝 떨어져야 제 맛이라오』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던 일화도 있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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