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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제자는 필자>|<제7화>양식반세기(4)-황실의 서양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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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양 오리에 맛들인 고종은 궁중의 양식을 맡을 식부관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국유학생 윤기익을 앉히고 서양요리의 본고장인 파리에서 일류 쿠크를 초빙하고 집기일식을 사들이게 했다. 그리하여 런던 대학광산과 출신인 윤기익은 엉뚱하게 궁중의 양식도입에 공헌하게 됐다.
또한 궁중의 선무장 안순환도 양식집기도입에 큰 몫을 맡았다. 정식부역 쿠트가 없던 때라 처음으로 나간 해외공관장을 통해 집기와 쿡·북(요리책)을 사들였는데 매끈매끈한 포크와 나이프는 스웨덴과 스위스에서, 도자기류는 벨기에에서, 글라스는 얇고 단단하고 투명한 프랑스 제품을 조달, 모든 그릇에 대한제국의 배꽃(이화)마크를 새겨 권위를 높였다.
인정전의 다이닝·홀도 프랑스 사람 콜브랑의 협력으로 샹젤리제궁 스타일을 본떠 찬란하게 꾸몄다. 냉장고는 없었지만 나무궤짝에 천을 깔고 얼음을 재어 원시적이나마 아이스·박스로 썼고 창고엔 외교 루트를 통해 각국에서 들어온 요릿감들이 군침을 돋웠는데 창덕궁연회장 홍붕표씨 마저 창고에서 마드리드제 딱지가 붙은 지중해 올리브가 나오는데 놀라움을 표할 정도였다. 경술합방이 되기가 무섭게 일본은 프랑스 요리에 탐닉해 있는 고종의 호감을 사려는 듯 일본 황궁의 요리사 요시무라를 고종에게 보냈다. 그는 14년 동안이나 파리에서 요리솜씨를익히고 3년간 일본황실에서 일한 베테랑이었다.
요시무라 aalx에 쿠크 이태운(고인) 이기풍(65)등과 보조원 3∼4명, 웨이터 10명 가량이 배속되어 고종의 입맛을 다스리는 양요리 팀으로서 나무랄데 없는 진용이었다. 쿠크 세계에도 각기 주특기가 있기마련인데 이태운은 쿠키 (식사 후에 나오는 것), 빵과 과자를 굽는데 당할자가 없었다.. 이기풍은 고기와 닭·생선 등 어·육류를 다루는데 명수였다. 양식의 3대 요소는 빛깔(color) 맛(taste)과 냄새(favor)라고 보겠는데 이들 쿠크는 도미를 저미는데 비단을 재단하듯 예쁘게 칼질할 뿐 아니라 『몇 사람분이냐』에 대답만 떨어지면 머리와 꽁지만 떨어져 나가고 주문대로 정확한 양이 도마 위에 잘려 나갔다.
굽고지지는데 조미도 그렇거니와 그릇에 모양새를 꾸며 담는데도 신기를 발휘했다.
당시 궁중에 교훈처럼 처져있는 한토막의 실화는 프랑스의 루이14세의 요리장이 식민지의 각국에서 들어오는 싱싱한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기로 국왕과 약속했는데 재료가 시간을 맞춰 당도하지 않아 약속을 못 지킨 것을 뉘우쳐 쿠크장이 자살했다는 얘기였다.
웨이터들의 훈련도 보통이 아니었다. 웨이터들은 날쌔게 몸을 날려야 된다하여 궁중 웨이터들의 구두바닥은 가벼운라고 나무창을 댔음은 너무도 유명한 얘기다.
고종은 이같이 훌륭한 쿠크와 웨이터를 두고 제맛나는 본고장양식을 즐겨 금요회 신하들을 위한 수요일(왕족들을 위한)를 동행각에서 벌이는 이른바 사찬을 곧잘 베풀었다.
이야기는 다시 프랑스 풍의 궁중양식에서 눈을 돌려 민간에 미국풍의 양식이 퍼지던 대목으로 돌아가서 좌옹 윤치호 선생과 양식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윤치호는 1885년 초대 주한공사 후트 장군과 상해 총영사 스탈의 주선으로 상해의 미션·스쿨 중서학원을 마치고 W·본넬 교수로부터 한국인으로 제1호 감리교인 세례를 받았다. 다시 미국에 건너가 내슈빌의 밴더빌드 대학과 조지아의 에모리 대학을 나왔고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따라 모스크바에 갔다오는 길에 일행과 헤어져 파리에 머물렀던 관계로 미국식과 프랑스식 요리에 흠뻑 젖어들어 귀국하자 약현(현 봉래동 언덕)에 대저택을 꾸미고 처음으로 민간 집에 양식 다이닝·룸을 차렸다.
더구나 좌옹 선생은 중국인 마노라 여사(미국 맥티어 여대 졸업생)와 국제 결혼하여 이미 70여년전에 서양식 스토브까지 장치하고 에그·프라이며 토스트에 버터를 바른다. 오트밀을 끓인다. 장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외무대신을 지낸 이하영과 명통영관으로 한성부윤을 한 이채연도 자택에 양요리 숙수를 불러다 놓고 무도회까지 벌였다. 이들은 외국손님은 꼭 집으로 초대하여 양요리를 대접했다. 알고 보면 이같이 외국물에 젖은 사람들이 양식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외국선교사들이었다.
또 외국어학교 교사들이 서양요리보급의 촉매역할을 했는데 피크닉이다, 파티다 하여 영어선생이 에이프런을 두르고 수십명의 학생들 앞에서 양요리 강습을 벌이는 광경이란 영어강좌인지 요리강좌인지 분간 못할 정도였다. 약현의 좌웅 선생 집에 자주 드나들며 양식을 즐기며 향수를 달랠 수 있었던 것은 도리어 아펜셀러니 언더우드 그리고 영·J·앨런과 같은 예선교사들이었다. 그대신 이들은 상해에서 버터·치즈며 드레싱(요리를 맛좋고 보기 좋게 꾸미는 것) 자료까지 기선편으로 실어날라 양식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조달원 구실을 맡기도했던 것이다. <계속> 【이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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