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제6화>창군전후(12)|이경석(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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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군조직법>
미군정아래서 군대가 아닌 경비대로 발족한지 2년6개월이 지난 48년7월에는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성장하여 장교 1천4백3명·사병 4만9천87명 등 모두 5만여명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정부의 수립과 함께 이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정식 국군이 되었다.
정부가 수립되고 종전의 통위부가 국방부에 모든 권능을 이양하던 날 유동열 통위부장과 이형근 통위부참모장·송호성국방경비대사령관·손원일 해안경비대사령관·정일권경비대참모장·이범석 국방장관·최용덕 차 관·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일본군 소좌였던 민간인 이종찬씨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양식이 끝난 후 이들은 국군조직법의 제정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마침 최용덕 차관의 임시부관으로 임명된 신응균 육군항공 이등병도 있었다. 허술한 통위부청사(서울남산동의 전병무청자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던 국방부 수뇌들은 신응균 이등병에게 국군조직법을 초안시키기로 결정했다.
신응균은 일본육사 53기생이며 하지진항공학교 정찰과를 나온 포병 소좌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뒤늦게 군대에 들어간 것은 46년에 귀국하여 진명 여 학교에서 수학선생을 하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47년7월 김정렬·이근석(공군준장·전사) 이영무·장덕창(4대 공군총장)·김영환(공군준장·전사)·최용덕·박범집(공군소장·전사)등이 주동이 된 육군항공기지부대에 들어갔다. 김정렬이 군에 갈 수 있는 마지막기회라고 권유하여 입대한 것인데 신응균은 김정렬의 경기 고보 3년 후배이며 일본육사 1기 위였기 때문에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또 김정렬의 부친 김준원과 신응균의 부친 신태영은 무관학교와 일본육사동기생(26기)으로 의기를 통한 사이였으므로 집안끼리도 가까이 지내던 터였다.
신응균이 최용덕 국방차관의 부관으로 기용된 것도 김정렬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육군항공이등병 신응균이 국방부 차관실에서 근무한지 며칠 안되었을 때 뚱뚱보란 별명을 가졌던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불려갔다. 『어때, 제나라 군대의 이등병생활이?』 『도루 젊어지는 것 같군요. 젊어지다니 언제 늙었었나, 그저 계급만 높았었지』 『군대서는 계급이 나이지요』 『알았어, 계급이 나이라는 말이 통하도록 해주지. 내일부터는 아예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게, 참아 못 보겠네.』 그 다음부터 신응균 이등병은 사복차림으로 출퇴근했는데 그에게 배정된 지프의 운전사는 육군중사였다. 그가 국군조직법을 기초하여 당시 법제처의 박일경 국장과 협의를 거치는데 처음에는 이등병이 왜왔느냐고 협의를 거절당했다가 일본육사출신이란 말을 듣고는 협조를 받았다는 것.
그가 초안한 국군조직법은 그해 11월30일 국회에서 통과했으니 건군의 초석이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공군창설문제가 크게 논란되었다. 이승만대통령도 공군창설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라버츠미 고문단장과 몇 차례 협의했지만 적당한 시기에 공군을 독립시키기로 하고 국군조직법에는 육군과 해군만을 규정하고 말았다.
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조항은 이 법안이 국회에서 심의되는 도중 보충되었다. 신응균은 그해 소위로 임관하여 50년에 준장이 되었으니 3년 동안에 이등병에서 별자리에까지 올라간 것이다.
건군 초기에는 상하계급이 빚어내는 화제가 많았다. 일제시의 상관이 옛 부하를 상전으로 모시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경례하는 일까지 있었다.
신태영과 신응균, 김준원과 전정렬·김영환형제, 유승렬과 유재흥, 안병범과 안광호(예비역준장·무역진흥공사사장)는 부자간이었으며 이응준은 이형근의, 백홍석은 채병덕의 장인이었다. 대개는 윗어른의 계급이 높았으나 어느 집에서는 아버지, 혹은 장인의 계급이 아들이나 사위보다 낮아 한동안 화제가 되곤 했다.
『아무개는 계급이 높은 아들에게 경례를 붙인다』느니 『백홍석 대령은 일부러 사위(채병덕 참모총장)를 피해 다닌다』는 말은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유승렬·김준원·신태영·안병범·백홍석 등은 모두 일본군대좌였고 아들이나 사위는 소좌 아니면 위관급이었는데 해방후 3년 동안에 신·안씨 등을 제외하고는 아들, 혹은 사위가 최고위 계급이었고 아버지나 장인은 여러 계급이 낮은 상태로 같은 군문에 복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같이 불명예스런 대접을 할 바에야 아예 군의 대 선배들을 받아주지 않았어야 옳았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여간 이 무렵에는 『집안에서 야단맞고 나와서 기압 준다』는 얘기가 장병들간에 심심찮게 떠돌았다.
한편 정부수립 후 국군은 진용을 강화하기위해 재야의 군 출신들을 대폭 영입했는데 김홍일 김석원 이종찬 이용문 김창규 박림항 장경순 이주일(예비역대장) 윤태일 유양수(예비역소장·주월대사) 김종순(예비역소장·국방장관보좌관) 이호(예비역준장·주일대사)등이 이때 군에 참여했다.(필자=예비역육군소장·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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