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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대구 사수(5)|낙동강 공방전 (19)|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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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낙동강 공방전 때 대구·부산 시민을 비롯한 후방 지역의 주민들이 불안한 나날을 보낸 것은 사실이었다. 전선이 뚫려 적이 침투하게 되면 갈곳은 부산 앞 바다밖에 없으니까 전세의 귀추에 따라 군관민 할 것 없이 전전긍긍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국군의 작전권은 7월14일에 유엔 군사령관에 위임되고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선포돼있어 사실상 행정부의 권한과 기능은 대폭 제약돼 있었다.
도시나 농촌에 때로는 진공 상태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후방의 전력원을 동원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태세와 노력이 여러모로 미흡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어느 전쟁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낙동강 공방전 때 국군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일부 지도층과 유지들이 전쟁을 외면하고 불미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은 기록에 남겨 교훈으로 삼을만하다.
▲장기영씨 (당시 체신 장관·현 국민당 사무 총장·68) 『부산서 낙동강 교두보 방위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제주도가 최종 거점이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한 때 나돌았어요. 이 무렵에 나는 지금도 부산에서의 불유쾌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일부 부유층 소극적 협조>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상당한 지위에 있는 분들이 가족 특히 아들들을 해외로 도피시켰어요. 2차 대전 때 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자기의 아들 4명을 모두 전선에 내보낸 것과 대조할 때 한심한 노릇이었지요. 그 뿐 입니까. 한국전쟁 때, 「아이젠하워」대통령과 「마크·클라크」「유엔」군사령관 아들이 모두 출전해 왔었고 특히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외아들인「밴플리트」2세 중위는 B-26 경폭기를 타고 북한에 출격했다가 실종되어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어요. 요는 그 때 한국의 일부 지도층의 정신 무장이 덜 돼 있던게 사실입니다. 』
후방 지역 내의 일부 지도층과 부유층도 처음에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으로 협조했으며 심지어는 국외 도피를 꾀했다는 사실이 두 설인의 증언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익렬씨 (당시 1사단 13연대장=대령·전 국방대학원장·예비역 중장·현 양회 협회 회장·52) 『내가 13연대장으로 수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대구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7월25일쯤인데 정일권 참모 총장이 나에게 「현역 군인들이 부산·마산 지방에 많이 숨어있다는데 색출하라」고 명령했어요. 국군이 초 전에 크게 당해 거의 와해 상태에 들어가자 일선 요원·후방 요원 할 것 없이 많은 장병들이 숨어버렸어요. 국회의원 등 유명 정치인·고급 관리들도 그 꼴인 자들이 많았어요. 어떤 자들은 일본으로 아주 빼버리기도 하고요. 전국 계엄 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정 총장은 숨거나 도망치는 자들을 모두 잡아내고, 말을 안 들으면 즉결 처분해도 좋다고 했어요.

<여관 뒤져 도피 장교 색출>
그때 영덕 지구에서 23연대장을 하던 김종원 대령 (고인)이 면직되어 육본 대기로 있었어요. 나는 다리가 불편해 김종원 대령을 부관으로 하고 헌병 2명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어요. 텅텅 빈 5여단 사령부를 접수, 1개 소대의 수색대를 편성해 시내의 여관 등을 뒤졌어요. 중령 급 이상의 고급 장교만 8명을 색출했어요. 하급 장교는 더 많고요. 내가 고참 대령이었는데 나보다 선임자도 있습디다. 서로 어색한 얼굴이 됐죠. 그분들은 「가족을 피난시키려고…」 어쩌구 저쩌구 변명을 했고, 나는 참아 잡으러 왔다 소리는 못하고 그냥 육본으로 보냈어요. 또 다대포·송도·영도 등에는 일본으로 도망갈 배들이 있었어요.
정치인·부자들이 단독으로 또는 합작으로 배를 사거나 빌어서 재물과 식량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어떤 자들은 숫제 배 위에서 살림을 하고 낮에는 내려오고 밤에는 배로 기어들고요. 그래서「저것은 누구 배고 이것은 아무개의 배다」라는 손가락질들을 했어요. 한번은 영도 뒤쪽 신호 등 있는 곳에 큰배가 도망치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내가 김종원 대령과 1개 분대 병력으로 잡으러 나섰지요. 우리를 보고 막 발동을 걸고 도망하려는 것을 총을 쏴 정지 시켰어요. 3백t급의 화물선인데 정치인들과 군인, 그 가족 70∼80명을 하선 시켰어요.
당시 현역 국회의원 수명과 역시 나보다 선임 고급 장교가 있는데는 놀랐어요. 김종원 대령이「역적 놈들」이라고 욕실을 하고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한 주먹씩 때렸지요. 그리고 모아놓은 다음 그 총살을 당할 테냐, 조국에 충성을 할 테냐」고 얼러대고 충성 서약을 시켰어요. 어쨌든 나한데 잡힌 자들 중에 당시 국회의원이 10명 넘었고 지휘관 급 장교는 10명 정도였어요. 나는 7일 후 대구로 귀환했고 그후 김종원 대령이 계속 맡아했어요.
나중에 들으니 당시 ○○부대 사령관 장모 중령은 역시 군제에 회부되어 총살당했고, 계모 대령은 역시 군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계 대령은 친구인 미군 고급 장교가 빼돌려 일본으로 피신시켰어요. 계 대령은 지금까지 해외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선근씨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대령·현 영남대학교 총장·66) 『7월17일께 대전서 정훈국이 대구로 철수했는데 역전에 가보니까, 수백 명의 부상병들이 열차로 후송되어 신음하면서 방치되어 있어요. 군복은 다 헤치고 누워서 물 한 모금 달라고 소리쳐도 누구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요. 조재천 경북지사 (고인) 에게 전화를 걸어 대구 시민들이 군에 물질적으로 협조한 것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봤어요. 조병옥 박사가 이끄는 구국 연맹에 2천만원의 성금을 거두어 내놓은 것 외에 휼병금이나 국방 헌금은 20만원 정도고, 사과 몇 궤짝 정도라는 겁니다.
정훈국 조사대를 시켜 대구 시내의 굵직한 부자 30여명의 명단을 뽑아 지사의 양해를 얻어 지사 명의로 집합 통지를 냈습니다. 소집 장소는 청구 대학 자리의 정훈국장실인데 10여명은 직접 본인이 나오고, 7∼8명은 대리인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런 비상 사태 하에서 국군에 협력하시오. 공산 치하가 되면 재산이 아무 소용없으며 광명 자체가 위협받을 것은 나 알지 않습니까. 국방 헌금을 좀 대십시오」라고 간청을 했어요.
그러자 한사람이 「당신이 뭐 길래 그런 소릴 하시오」라고 반발해서 한때 분위기가 사나와졌지만 결국 다들 이해하고 자율적으로 돈을 내놓았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2천여만원과 사과 「메리야스」등이 8 「트럭」분이 모였어요. 민간 대표 2명을 뽑아 그 돈으로 위문품을 사서 일선에 보냈습니다.
전쟁이 낙동강 교두보로 한참 죄어들 때 부산서는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이 배를 사서 피난 짐을 싣고 우두에 대놓고 있었어요. 「○○ 전선이 위태롭다」하면 배를 바다에 띄우고「전황이 호전된다」하면 배를 도로 부두에 대고요. 이런 사람들을 정훈국이 맡아 그러지 못하게 했어요. 또 소수의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하는 등 도피한 모양입니다. 그 보다도 6·25전에 외국에 나갔다가 일본에 머무르면서 귀국을 안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어요.』

<사경 훈련 않고 전선 투입도>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후방에서의 가장 중요 사업인 모병이 순조로 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특히 때로는 길을 막고 모집한 신병들이 기피나 탈주 없이 용약 일선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매우 감명 깊은 사실이었다.
▲최석씨 (당시 제1훈련 소장=대령·예비역 육군 중장·현 안보회의 고문·50) 『낙동강 공방전이 전개될 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병력 보충이었습니다. 연일 혈전이 벌어지니까 소모가 엄청난데 이를 빨리 보충해야 하니까요. 8월 초에 대구에서 교육대라는 명칭으로 내가 책임자가 되어 신병 모집 훈련소를 차렸어요.
며칠 후 제1훈련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9개 대대가 있었어요. 1개 대대는 2천∼2천5백명 정도지요. 입소 신병은 7일간 교육을 받게 돼 있었어요. 하지만 급할 때에는 2∼3일간 소총 사격 훈련만 시켰고, 더 급할 때에는 사격장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그대로 일선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보통 하루에 제1훈련소에서 5∼6백 명을 열선에 보충했는데 많을 때는 2∼3천명을 보낸 적도 있지요. 특히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신편 할 때에는 보충해줄 병력이 달렸어요. 그럴 때는 기간 사병들로 길거리를 막고 원주민이나 피난민 할 것 없이 20∼35세까지의 청소년을 급모해 보냈어요. 비상시인만큼 이런 비상 수단을 안 쓸 수가 없었지요.
그 때 신병을 일선에 보낼 때는 하루 전에 집에 보내서 가족과 면회하도록 했어요. 그래도 도망치는 신병은 별로 없었어요. 이 점은 참 감명 깊은 일이었습니다. 또 빼달라고 소위 「빽」을 쓰는 사람도 없었고요. 내 권한으로 대구 도청 직원과 국민학교 교사는 빼주었습니다.
내가 8월초부터 9월 하순까지 훈련시켜 일선으로 보낸 신병은 약 5만명 정도 됩니다.』
다음은 낙동강 공방전 때, 후방의 계엄 민사 업무는 어떻게 실시됐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김완룡씨 (당시 경남지구 계엄 민사 부장=대령·전 육본 초대 법무감·예비역 소장·현 서울 합동 공증인 사무소 공증인·53) 『6·25며칠 전 개복 수술을 하고 있다가 괴뢰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간신히 한강을 건너 부산에 가서 입원하고 있을 때입니다. 육군 참모 총장에서 경남 지구 계엄 사령관이 된 채병덕 소장이 나를 찾아와 계엄 업무를 맡아달라면서 직인과 기밀 비를 던져줍니다. 이래서 내가 계엄 민사 부장이 됐어요. 채 장군은 모든 계엄 업무는 나에게 일임하고 진주 쪽 최전방으로 싸우러 가고 했어요.
삼권을 한 손에 쥔 나로서 급선무는 피난민 구호 문제였어요. 전국서 몰려온 수백만 피난민을 수용하려고 각급 학교와 건물을 징발했지만, 모자라서 가마니 뙈기를 나누어주고 공지에서 자게 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흘러 배편으로 거제도 등 여러 섬으로 분산도 시켰습니다. 식량은 미국에서 많이 원조해 주었구요.
그때 나는 5명의 장교를 데리고 계엄 업무를 입안·명령·확인했는데 실제 집행은 양성봉 경남 지사 (고인)가 도청의 행정력을 동원해서 했어요. 참 수고가 많았지요. 또 그때 아무개가 금 덩어리를 일본으로 반출한다느니 어떤 사람들이 일본 또는 제주도로 도망친다는 소문이나 돌기도 했어요.
그러나 너무 급한 일이 많아 그것을 단속 처벌할 시간이 없었어요. 비전투원의 일거 일동을 살필 상황이 없었던 거지요. 어떤 사람은 부산 인심이 고약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때 부산 시민들의 피난민에 대한 협조는 후세에까지 본 받을만합니다.』
한편 기록을 보면, 8월18일 적박격포탄이 대구에 떨어졌을 대 시민이 공포에 빠진 것처럼, 9월5일에 영천이 떨어져 미8군 후방 사령부가 대구서 동래로 후퇴할 때 부산 시민들도 일시 혼란에 빠졌다.
※정정=본 연재 133회 본문 기사 중 조기백 중위 「(휴전 무렵 전사)」를 「(62년8월20일에 전방 연대장으로 간첩 색출 중 순직)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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