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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마산의 위기 (4)|낙동강 공방전 (14)|「6·25」20주…3천명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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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킨 작전에서 좌익을 맡은 미 해병대는 12일 아침 사천을 향해 진격을 재촉했다. 봉암리에서 적에 포위된 우군 포병대를 구출하려고 제3 대대가 그곳으로 차출됐지만 주력 부대는 그대로 목표 지점을 향해 전진했다. 이날 하오 1시쯤 부대가 사천 동남방 6㎞지점의 창천에 도착하자 접적이 시작됐다. 적 15연대의 제2대대와 제83 기갑 연대는 높은 산 위에 교묘한 진지를 구축하고 접근하는 미 해병대를 매복, 기습하려고 했다. 해병대가 낮에 여기에 도달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아마 야간에 이 지점에 이르렀다면 꼼짝없이 적 함정에 빠져 우군기의 공중 지원을 못 받은 채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해병 제1대대는 도로 양쪽의 적 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저녁때까지는 301·205·202의 새 고지를 점령했다.
이 고지 공격이 쉽게 성공한 것은 우군기가 긴밀하게 공중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해병대와 해병대 직속 함재기와의 협동은 다른 부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긴밀하다. 해병기들은 평소에도 해병대와 상륙 연습을 하기 때문에 지상의 해병과 항모로부터 출격하는 해병 함재기 사이의 유대감은 매우 강하다.
창천 고지 공격 때에도 해병대의 「코르세어」기 편대는 늘 체공하면서 우군을 지원했고 지상에서 긴급 요청이 있을 때에는 수분 안에 진해만에 있는 항모로부터 비래하여 포병보다도 더 긴밀하게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천에서 적대 부대가 해병대 진격을 대기하다가 격돌이 벌어짐으로써 킨 작전 좌익 부대의 진출도 둔화하였다. 봉암리에서의 포병대의 대 손실과 함께 사천에서의 해병대 진격 부진으로 킨 반격 작전은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리라고 예견됐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다른 낙동강 전선은 중대한 위기에 처했었다.

<대구 정면의 적 흡인 못해>
특히 낙동강 돌출부에 적 4사단이 연하 침입하여 영산이 누난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미 8군은 예비대의 거의 전부를 투입하여 뚫린 전선을 메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제 8군으로서는 킨 반격 작전을 계속할 여유나 힘이 없게 되었다.
이래서 워커 사령관은 12일 밤 킨 반격 작전의 중지를 결심하고 킨 소장 휘하 부대를 서북산의 선에 반전시켜 방어 태세를 취하게 하고, 이로써 남는 해병 여단을 8군 예비대로 두기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윌리엄·B·킨」소장은 13일, 휘하 부대에 반격 작전 중지를 하달했다.
이리하여 킨 반격 작전은 꼭 1주일 안에 중단됐는데 미전사가 「로이·애플먼」은 그의 저자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에서 이 작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킨 부대는 7일 동안 공노를 취하여 목표의 진주 장재실 고개를 일시 탈환했지만 작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킨 부대는 대전한 적 6사단을 격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서북방으로부터 쫓아내지도 못했고 또 방어선을 진주 고개와 사천 라인으로 뻗어 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배후에서 적의 역습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본 작전의 주목적의 하나인 대구 정면의 적을 흡인하지도 못했다. 북괴군은 대구방면으로부터 한명의 병력도 마산 전선에 돌리지 않았다. 완전한 제공권을 가진 2만4천의 대병력으로써 7천5백으로 추산된 적 6사단에 대해 전개한 이 공세는 지형과 북괴군의 독특한 전법에 말려들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적의 예봉을 꺾어 마산을 안전케 하고, 부대원에게 공격전을 경험케 하고 낙동강 교두보의 남익이 된 남강-서북산-진동리의 점령을 손쉽게 한 것은 그런 대로 이 작전의 성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적도 병력 반수 이상 잃어>
킨 반격전이 소기의 성과를 못 얻었지만 이 전투에서 적 6사단도 막심한 피해를 받았다.
병력 소모만 4천 내지 4천5백 이어서 잔존 사단 병력은 3천 내지 4천에 불과하여 단숨에 마산을 점령하려던 그들의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8월14일에 킨 소장의 25사단 주력은 북으로부터 제35·제24·제5연대의 순서로 병렬해서 남강 남안으로부터 십이 당산-전투산-필봉-서북산-여오고지-왕녀봉에 이르는 선을 점령 확보했다.
이때의 25사단 배치의 특징은 여태까지 차량이 많은 미군이 기피하던 산악 고지에 주진지를 친 점이다.
특히 서북산이나 필봉·전투산은 경사가 가파라서 올라가는 데만 3∼4시간이 소요됐다. 여기를 주진지로 선정하는데 있어 이견이 많았지만 진내 기동과 반격을 위해 불가결한 마산-진동리-함안-마산의 환상 도로를 확보하고 마산시의 정치적·심리적 가치 등을 고려해서 이와 같은 결정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높이 7백m의 산정에 대한 유일한 보급 수단은 「지게」뿐이어서 사단은 4백 내지 5백명의 한국인 노무자를 채용했는데 간혹 개중에는 적「게릴라」나 내통 분자가 끼여 피해를 주기도 했다.
한편 적 6사단은 북으로부터 제13·제14·제15연대를 병렬해서 미25사단과 맞섰는데 특히 14연대는 미군진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서북 산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적 6사단은 킨 반격 작전으로 막심한 피해를 받아 당장 공격을 재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8월12일에 진주에서 처음으로 2천명의 병력 보충을 받았지만 이 보충병은 대부분이 안동 출신의 남한 의용군으로서 훈련도 부족한데다가 무기도 반수밖에 갖지 못하고 있었다.

<8군 예비대 또다시 투입>
탱크는 12대가 남아있었으나 연료 부족으로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식량도 7월 하순이래 보급이 재대로 안 돼 병사들의 체력은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적 사단장 방호산은 8월18일 밤 십이 당산에 대해 불의의 대 야습을 가해왔다. 이 야습은 유엔 군의 총반격이 전개되는 9월20일까지 이 방면에서 벌어진 산악전의 서막이었다. 8월18일의 야습으로 한때 십이 당산의 미군은 밀려났으나 포 폭격의 지원으로 겨우 원진지를 회복했다.
이 야습이 적 6사단으로서는 그들 8월 공세에 있어서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그러나 방호산은 그들의 최후 몸부림인 9월 공세에 맞추어 다시 한번 마산에 큰 위협을 주었다.
8월31일, 10여일 동안 재편과 장비 보충을 받은 적 6사단과 새로 투입된 제7사단은 총 공세로 나왔다. 미25 사단은 24연대 정면에서 적 6사단에 돌파되어 함안이 떨어지고 우익의 제35 연대 지구에서는 적 7사단 주력이 침투하여 남지교와 마산간의 도로가 차단됐다.
킨 사단장은 24연대로 역습시켰으나 성공치 못했다.
예비대를 갖지 못한 킨 사단장은 워커 장군에게 30일 마산으로 전진, 8군 예비대로 차출된 27연대를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했으나 우선 1개 대대만 돌려 받았다. 나머지 2개 대대도 결국은 나중에 마산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때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 걸쳐 적의 9월 총공세가 시작되어 어디다가 가장 효과적으로 예비대를 투입하느냐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각 전선이 모두 위급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적 제9·제2사단의 진격 목표인 영산 지구가 제일 위험해 보였다.
이 방면의 적은 많은 탱크를 가지고 8군의 동맥인 경부 국도로부터 불과 20㎞미만의 지점에 육박하고 있었다.
9월l일 마산에 있는 미25사단사령부를 방문한 워커 장군은 이 지역 사태도 생각한 것보다 더 위급한 것을 알게되었다. 좌익의 제5연대 정면에 대한 적 병력은 대단치 않았으나 중앙의 제24연대는 거의 분산되고 우익의 제35연대는 각 중·소대가 포위돼 있었다. 또 사단 포병대도 잠입한 적으로부터 소규모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마산시 주변에는 게릴라가 자주 출몰했다. 그러나 25사단에 증원군을 보낼 예비대가 없어 사단은 독자적으로 적 공격을 물리쳐야 했다.

<9월7일부터 총 공세 둔화>
미 제5공군과 함재기들은 전력을 다해 위기에 처한 우군을 지원, 31일 하루 동안만도 미25사단에, 3백여대가 지원 출격을 했다. 1일 하오 적 7사단은 미25사단 35연대 진지를 돌파, 칠원도를 차단했다. 킨 사단장은 27연대 1대대에 이 적을 저지하려고 함안 정면에 대한 역습을 명령했다. 1대대는 8대의 「퍼싱·탱크」를 앞세우고 맹렬한 포부대의 지원 아래 공격을 개시하여 진지 일부를 탈환했다. 그러나 3일에 1대대는 4개 대대의 적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았고 십이 당산을 고수중인 제35연대 제1대대도 밤새껏 침투하는 적과 싸웠다. 두 대대는 역전하여 적에 큰 손실을 주고 끝내 진지를 사수했다.
아침에 보니 제1대대 주변에는 약 1천의, 그리고 십이 당산은 약 5백의 적 유기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또 4일 저녁에 포병 구급차 출동한 제27연대 3대대는 마산 북방의 중리 부근에서 약 1천명의 적과 조우, 이를 격파했고 제2대대도 남강변에서 우세한 적 공격을 저지했다. 이렇게 이날 27연대의 3개 대대는 모두가 적 대부대와 부닥쳐 잘 싸웠다.
9월7일부터 마산 방면의 적 공세는 둔화하기 시작했다. 적 6사단과 7사단은 수많은 유기시체를 남기고 점점 퇴각하는 기미를 보였다. 특히 미35연대 전투 지역에는 약 2천의 적 유기 시체가 버려져 달라붙은 파리 떼로 햇빛이 가려질 지경이었다. 이날 워커 사령관은 각 중소대가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도 제35연대가 진지를 고수, 적에 막대한 타격을 준 공을 치하하여 연대장 「헨리·G·피셔」대령에게 사령관 표창장을 수여했다.
이때 이미 적 6사단의 제14, 제15연대장이 무모한 공격을 계속하다 둘다 죽어 지휘 계통도 크게 악화됐었다.
9월 공세를 맞아 다른 전선은 아직도 위급했지만 마산 방면에 관한 한 7일께에 대세는 대체로 판가름났다.
8군 작전 참모 「존·A·다브니」대령이 예상한대로 탱크의 신통력을 잃고, 종심 전력을 배려치 않고, 보급이 지속되지 않은 북괴군의 9월 공세는 마산을 바로 눈앞에 두고 숨이 끊어진 것이다.
※알림=낙동강 공방전 때 국군 1사단 12연대 수색 대장이었던 상사 배성섭씨는 곧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 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정=1월25일자 본연전 129회의 사진 설명 중 부산시장 김주한씨를 김주학씨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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