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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자유와 정신|도스토예프스키 90주기|이보영(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금년은 19세기 「러시아」문학의 거인 「도스토예프스키」(1821·10·30∼l881·l·28)의 탄생 l백50년인 동시에 서거 90주기가 되는 해이다.
특히 1월28일 그의 서거 90주년을 맞아 상기되는 것은 이미 「도스토예프스키」열이 식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5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문학을 풍미했던 실존주의의 퇴조와도 관련이 깊지만 그 이전부터 그럴 수 있는 여건은 급속히 성숙되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금세기에 들어 한층 현저해진 과학기술의 발달과 고도로 조직화한 정치적 통제 아래 사람들의 감성은 자꾸만 비인간적이 되고 정치·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날로 번져 가는 시대풍조가 바로 그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처럼 열렬히 두둔하여 소설 속에 그렸던 학대받는 자, 약자의 생활상도 이젠 답답하고 너절한 것으로 느껴지기 쉽다. 『죄 없는 아이들의 눈물을 보상하라』는 「이반·카라마조프」의 소리도 감감해졌다.
포화에 어머닐 잃고 울상이 된 월남어린이의 사진은 한남 「뉴스」거리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되돌아본다 해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나 당시로서는 무서운 반항아였고 또 그 점에 그의 영원성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그의 저항의 양상을 살펴보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천재적 예술가에게서 흔히 보는 모순점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그 생활과 사상상의 모순이 어찌나 심한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어리둥절할 정도다.
한 예로 그의 「츠아」제정에 대한 태도만 해도 「시베리아」유형에서 돌아온 후로는 그 전과는 판이하게 충성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집의 기록」이후의 모든 작품에는 처녀작(가난한 사람들)에 벌써 보이는 학대받는 자에 대한 뜨거운 동경이 고질병적 징후처럼 스며있다.
또한 「러시아」정교에 대한 견해만 하더라도 그 자신 진정한 정교도로 자처했지만 그가 신봉한 정교와 현실의 정교는 거리가 멀었다. 철저한 심정의 자유에 바탕을 둔 그의 신앙과는 달리 그 당시의 정교는 역사적으로 「츠아」제정의 어용기관이요 강제성을 띤 것이었다.
이런 모순들은 일단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오로지 「예술가」로서 바라보려 할 때 많이 해소된다. 아니 그런 모순을 안고있었기에 오히려 그만큼 성실한 예술가였다고 말하고도 싶다.
그가 저항한 대상은 대충 기성사회·기성문인과 종래의 창사방법에 대한 것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는 1861년(농노해방의 해)을 전후하여 급성장한 자본주의경제의 부산물인 도시의 몰락귀족, 군소 관리, 지식노동자, 실업자들을 그릴 때 그저 초연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 그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괴로와하면서 그렸고 바로 이 점에 당시의 민중적 작가와의 차이점이 있고 동시에 그의 특이한 성실성이 있었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그가 사회주의자들을 무신론자라하여 규탄했을지라도 그가 민중(곧 농민)적인 정교의 신념으로 하여 무의식적으로 현실의 정교에 맞섰던 것처럼 소박한 민중의 편에 서서 압제자와 맞선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러시아」최초의 지식노동자로서의 작가였다. 그가 「톨스토이」와 「투르게니에프」같은 기성문인의 문학을 가리켜 「지주문학」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끝장을 보았다고 단정한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톨스토이」가 주로 외면적·일상적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사건을 서사시적으로 전개한데 반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법이 심리적·극적이라고 곧잘 지적되는 것도 실은 양자의 생활환경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전통적이요 안정된 장원의 귀족주의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대도시(가령 「페테르부르크」)의 생활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뒤숭숭한 것일 밖에 없고 주민의 신경은 거개가 병적으로 초조해지기 쉽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끊임없이 자기를 혁명기의 작가, 변전무상한 과도기의 문인으로 의식하고 과거가 아니라 현재, 아니 불안한 현재가 아니라 묵시록 적인·미래사회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하여 창작기법도 종래의 그것에 대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의 도시소설 속에 가령 목가적인 전원소설이나 역사소설에서 보기 힘드는 신경병적인 환영을 여러 형태로 등장시켜야 할 때 작자가 취하는 기법은 달라진다.
자주 인용되는 거지만 「스트라호프」에게 준 편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거개의 사람들이 환상적·열외적 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자기로서는 종종 현실의 본질이며 저 일상적 사건을 인습적으로 보고 다루는 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한 뒤에 매일의 신문「뉴스」의 사실들 자체가 기이한 환상물 같지 않으냐, 그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 <뿌리 없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꿈같은 일이라면 『백치』의 주인공 같은 환상적 인물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파악한 「리얼리즘」의 이런 심리적·상징적 특질을 그는 극단에까지 실험했고 그 실험 속에는 분신이나 신화적 「이미지」몽롱한 병적 의식상태나 특히 형 이상적 관념 등이 활용되고있다.
게다가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어도 한 작품의 「구성」면에 그가 기울인 관심은 시점의 연구에서 주제의 사상적 통일을 위한 배려에 이르기까지 최고도로 성실, 면밀한 것이었다.
이게 모두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가로서의 깨끗한 양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 양심은 정신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아무리 생활을 위해 현실과 타협한다 해도 일단 「펜」을 들고 창작 「노트」를, 원고지를 메울 때 그는 그 테두리 안에서만은 영웅이요, 왕이요, 종이었다.
이 자유, 그가 『대 심문관의 전설』(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그렇게도 강조했던 자유로운 정신은 그가 신앙의 구심점으로 삼은 예수의 가르침에 우리가 공명하든 않든 참으로 귀중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양심과 용기를 되살려 주는 불변의 원소가 아닐까?.
이런 생각은 19세기 후반기의 그 숨가쁜 과도기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로잡혔던 말세감을 그 국면은 다를지언정 맛보아야하는데다가 후진국에 태어난 업보를 감수해야 되는 처지라면 더욱 절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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