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화제...「앙그르」의 연필화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세기「프랑TM」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앙그르」의 연필화전이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려 화제가 되었다.
『「로마」의 「앙그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전시회에는 그의 고향「몽토방」의「앙그르」미술관소장의 1백50점을 포함한 1백50점의 소묘가 수집 공개되었다. 『인물과 폐허가 담긴 고전풍경』을 그린 「앙그르」의 풍경화가로서의 진가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
「유럽」의 풍경화가에겐 부서진 대리석조각과 목가적인 시골풍경을 가진 「로마」가 가장 익숙한 소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로마」를 그린 대표적 풍경화가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고 「프랑스」인인 「푸셍」「클로드」 와 「코로」등이었다. 물론 「앙그르」도 비할 바 없는 고전주의 풍경화가임에 틀림없다.
「앙그르」는 1806년 「프랑스·아카데미」의 장학금을 가지고 「로마」에 왔다. 벌써 천재화가로 유명했던 26세의 그는 처음에 「로마」 에서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파리」에 비해 보잘것없는 시골냄새를 풍기는 「로라」를 처음엔 싫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서 14년간 생활했다.
「로마」를 소재로 한 화가들의 인물화에는 으례 거대한 석주나 흉상을 함께 그리기 마련인데 「앙그르」의 그림은 그 점에서 좀 특이하다. 그의 작품 「기용·래티에르」부인과 그 아들』을 보더라도 두사람은「스페인」식 층계를 배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실제풍경에서 뚜렷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도시의 특수성이며 시대와「스타일」의 부각이었다. 그가 『「스케치」는 결백한 미술』이라고 한 것 같이, 그의 기술은 이 결백성을 표하는데 집중되었다. 「나폴레옹」이 전쟁시대에도 그는 영국제의 좋은 종이를 구해 그렸으며, 미묘한 점과 선으로 연의 농담을 구사해서 질감을 주었다. 1867년「앙그르」가 죽었을 때 그의 연필선의 정확한 사용법을 배워 터득한 사람은「드가」와 「피카소」를 제외하면 볼 수 없다는 정도의 기법을 그는 구사했던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