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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양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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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탈리아」작곡가 「풋치니」의 가극「라·토스카」는 미모의 가희「토스카」와 화가 「카바라도시」의 순애보이다. 유명한 「아리아」『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바로 이 「오페라」의 제2막에 나오는 「토스카」의 절창이다.
「토스카」의 연인 「카바라도시」는 방금 총살형의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토스카」는 이때에 애절한 노래를 부르며, 경시총감 「스카르피아」에게 그 연인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드디어 순결까지 바치겠다고 고백하는 「토스카」에게 경시총감은 거짓 총살집행을 명령한다. 그리고는 출국 허가서까지 내 준다. 특별사면을 받은 것이다.
「나폴레옹」시대에나 볼 수 있는 이런 일이 최근 중화민국에서도 있었다. 형사가 피고의 처에게서 정조를 뇌물(?)로 받고 사면을 시켜준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일들은 「로마」나 대만의 얘기들이다. 어느 나라나 사법권의 독립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어있다.
일본에서도 최근 한 지방법원의 판사가 고위층으로부터 받은 쪽지를 폭로한 적이 있었다. 미국도 「존슨」대통령 말기에 대심원장 인준문제를 둘러싸고 「가십」이 자자했었다.
민주주의의 전통국인 영국에선 수상이 지나가면 앉아있어도, 판사가 지나가면 누구나 일어서서 깎듯이 모자를 벗는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독립된 법관」의 위엄은 사회의 존경과 신망 속에서 보호받는다.
최근 대구의 고법에서 비롯된 사법부 정풍운동은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만일 사법부의 독립이 무슨 압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다면 그 실망은 더 이를데 없을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최후의 양심은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것이 심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위협을 받는다면 국민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판사의 양심이 금력에 의해 흐려진다면 국가도 책임을 져야 한다. 국가는 이들의 양심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상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옳다. 현대의 기능사회에선 법관에게 일 방적으로 성직자다운 고행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때 사법권은 온전히 보호될 수 있다. 정작 부자유의 정체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법관들의 양심회복은 일방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법을 존중하는 사회나 그 사회를 보람있게 생각하는 위정자들에 의해 함께 성취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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