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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꼬일 때면 재래시장 찾아 민심 ‘장보기’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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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인천 부평종합시장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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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인천 부평종합시장을 찾았다. 취임 이래 네 번째 재래시장 방문이다. 네 번 모두 국정 운영이 꼬인 시점에서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경남 통영 중앙시장을 찾았고 지난달 16일 인천 용현시장을 찾았다. 중산층 증세 방안을 담은 세제개편안 발표로 지지율이 흔들릴 때였다. 지난 17일 세 번째로 용인 중앙시장을 방문했을 때는 박 대통령과 여야 대표의 3자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직후였다. 이번 부평시장 방문도 기초연금 축소 방안이 공개되면서 ‘복지공약 후퇴’ 논란이 가열된 직후 이뤄졌다.

“복지공약 축소 의식, 더 자주 방문할 듯”
여권 관계자는 “지지율이 흔들릴 때마다 박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하고 있다”며 “특히 복지공약 축소 비판을 의식해 앞으로 더욱 자주 시장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27일 “(박 대통령이) 지역을 가면 가급적 재래시장 등 민생현장을 들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재래시장 방문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다. 시장이 위치한 지역구의 자당 의원을 통해 시장 상인들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해두는 건 기본이다. 방문 전날 3~4명의 선발대를 파견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각, 정치인이 인사하기 편한 통로를 체크한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대통령이 누구랑 인사하고 어디서 물건을 살지도 미리 정해놓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시장을 찾는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인의 수행원들은 주인공보다 몇 걸음 앞서가면서 미리 상인들의 반응을 살핀다. 반대 정당을 지지하는 상인과 인사하다 어색한 모습이 연출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수행했던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문 후보가 이리로 오십니다’라고 말하며 상인의 표정을 보면 지지자인지 아닌지 금방 티가 난다. 주인의 표정이 굳어지면 그 가게는 스쳐 지나가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게에 잠시 들를 때는 다른 가게 상인들의 항의를 막기 위해 3분 넘게 머무르지 않는 게 관행”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시장을 찾을 때 쓰는 비용은 보통 6만~7만원 선이지만, 명절 대목 등 상황에 따라 10만~15만원가량 쓰기도 한다고 그는 전했다.

계산은 대부분 주변 수행원이 대신한다. 정치인이 지갑을 꺼내 돈을 세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인식에서다. 최근엔 현금 대신 재래시장 상품권인 ‘온누리 상품권’으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정치인이 시장 방문 때 물건을 사는 것은 그 액수가 얼마든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 액수만큼의 물건을 받기 때문에 향응 제공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후보등록 이후의 선거 기간이 아닐 때 정치인이 시장을 돌면서 명함 등을 주는 행위는 선거법에 위배된다.

한국과 달리 외국 정치인들은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 조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버지니아주 앨링턴의 한 햄버거 가게에서 6달러95센트짜리 치즈버거로 점심을 해결했다. 다른 손님들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또 미국 대통령들은 매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을 백악관에 초청해 만찬을 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미국에서도 정치캠페인 대상은 노동자 등 서민층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인 햄버거나 미식축구·야구장 등을 정치인들이 직접 찾아가 친밀감을 형성하고 지지율을 높인다”고 말했다. 또 100년 이상 된 노포(老鋪)가 2만2000개 넘게 있는 일본에선 의원들이 선거 직전 노포들이 몰려 있는 시가를 돌며 인사하는 게 관행이라고 박철희 서울대(일본정치) 교수는 전했다.

반면 유럽에선 정치인들이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찾는 대신 정책토론으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과 달리 인물보다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승리한 최근 독일 총선도 총리와 야당(사민당) 당수의 일대일 토론이 주요 변수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쇼라는 비판 듣더라도 꼭 필요한 행사”
박 대통령의 ‘시장정치’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예단할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벤트성 행사는 하지 않겠다”며 시장 방문을 기피했다가 “민생현장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주 재래시장을 찾아 어묵·떡볶이를 사먹는 모습을 보였다. 임기 초반엔 친서민 행보란 호평을 들었지만 후반엔 경제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쇼”라는 비판을 들었다.

민주당에서 당료로 재직했던 이규의 한신대 초빙교수는 “시장 방문이 바로 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과 달리 서민과 밀착해 있다는 걸 과시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인 데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환각효과도 커 정치인들이 수시로 방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명지대 윤종빈 교수는 “재래시장 방문이 ‘쇼’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런 행사도 안 한다면 국민의 정치 불신은 더 커질 것”이라며 “쓴소리를 좀 듣더라도 유권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정치인들에겐 시장 방문이 꼭 필요한 정치과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류정화 기자 jh.ins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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