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동남아의 패자|해양 왕 장보고|본보 새 장편연재소설「대해도」주인공 사적고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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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장편소설『대해도』가 새해부터 본지에 연재된다. 작가 송지영씨가 집필한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 동아일대의 해상 왕이었던 장보고의 일대기를 엮는 것이다. 장보고는 한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양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왔다. 특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이면서도 바다를 잊고 멀리하기만 한 우리 국민에 있어서는 그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육 당은 일찍이『우리 국민 생활의 과정에 있어서 가장 비통한 사실은 반도국민, 임해 국민으로서 바다를 잊어버린 일이다.
바다를 잊은 뒤의 우리의 환난이 얼마나 큰가는 우리가 분명히 체험하고 또 지금도 그 시련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한국 해양 사』서문)고 갈파한 적이 있다.
1930년대에『신라인의 해상발전』이란 논문에서 치음으로 장보고를 연구 발표한 김상기 박사도『장보고가 우리 역사상 유일한 해상 왕국 건설 자』라고 평가했다.
장보고는 궁 복, 궁 파로도 불렸고 일본의 기록에는「장보고」라고도 되어 있는데 가계나 출생지가 밟혀지지 않은 인물이다. 미천한 집에 태어나 출세에 어려움을 느끼고 일찍 중국 만주에 건너가 무 령 군 소장으로 군사적 요직에 등용되었다.
그는 중국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다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이들의 구출에도 노력했으나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해적의 소탕임을 자각하고 본국에 돌아와 흥덕왕에게 청해진의 설치를 건의했다.
그는 대사에 임명되어 완도 가리 포에 성 책을 쌓고 1만 군을 지휘했으며 변 민을 규합, 민병도 조직했다.
장보고의 해상권 장악은 해적의 소탕과 교 통로 확보에만 그치지 않고 물자를 가득 실은 무역선원을 당과 일본에 보내 대규모의 교역을 했다.
일본에는 회 역사를 자주 보내고 중국에는 유 당 매물 사의 인솔로 교관 선을 빈번히 파견함으로써 나·당·일 3국간의 교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당의 무역 중심지는 산 동 반도의 동남쪽 등 주의 문등현청령향적산포였다. 여기에 있는 법 화원은 신라인의 사찰이자 신라 거류민의 집회소였고 본국과의 연락 기관의 임무도 맡았었다. 그는 이 적산 법 화원을 세우고 운영했다.
장보고의 대 당 무역 중심지역은 남으로 양자강 어귀에서 북으로 산 동 반도에 이르는 일대였다. 등 주 문 등 현 외에도 강소성·회안현의 초 주와 사주의 연수 향 같은 곳으로 신라인의 세력권의 크기를 가름할 수 있다.
그의 무역 선단에 회 역 사·유 당 매물 사의 칭호가 붙게 된 것은 그의 무역이 신라인의 무역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규모가 사 무역이기보다는 국가적 규모였기에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바다를 지키는 파수로서 3국간의 교역을 중개하는 당상으로서 그는 신라의 국위를 사해에 떨쳤던 것이다.
작가 송지영씨는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장보고와 이순신을 들었으며, 특히『장보고는 단순한 해전의 영웅으로서 뿐 아니라 국제무역을 통한 동아해상의 지배자로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백 교수는 장보고의 위치를 사회사적으로 분석,『서울 중심·귀족 중심이었던 신라 사회에 대해 대립적인 지방 중심·상민 중심의 장보고가 국내보다도 국제적인 활약을 한 점』에 주의를 환기하고『강대해진 그가 중앙과 연결을 하고 중앙으로 진출하려 하다 실패한 것을 분기점으로 해서 지방 세력들은 중앙 세력과의 결합을 단념하고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게 됐다』고 했다.
특히 제6회「아시아」경기 대회수영 종목에서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희 보와 함께 날아온 남영호 침몰사건의 비보로 바다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우리들에게 그 옛날 동남아의 바다를 제패했던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는 작업은 더욱 뜻 있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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