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2)<제자는 필자>|<제2화>무성영화시대|신일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리랑』2편>
나운규씨와 김을한씨 등이 나의 결혼을 말렸지만, 영화계도 어려운 때라 다른 대안을 낼 수가 없었다. 나를 아껴주던 당시 신문기자들은 내가 애처로와서 인지 지상에 보도하지는 않았었다.
결국 나는 결혼하게 되었다. 1927년 음력 9윌27일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였다. 남편인 양승환씨는 나보다 세 살 위인 19세.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해서 양가의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조선호텔에서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15세에『아리랑』에 데뷔해서 채 2년도 되기 전이었다.『아리랑』에서의 이미지가 좋아 그대로 계속했으면 지금과는 좀 다른 일생이 되었을 텐데… 하여튼 주사위는 던져졌던 것이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바로 그 날 밤차로 도망치듯 시가인 전남화순군 능 주 골로 내려갔다. 당시 시댁은 삼천 석 군으로 인근에서 이름난 부자였다. 집에는 여러 명의 하인과 백마까지 있어 나들이 때는 하인이 모는 백마를 타고 다닐 만큼 떵떵 울리는 집안이었다.
시집은 첫날부터 손에 물 한번 적셔보지 않고, 인자한 홀 시어머니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달콤한 신혼생활이 3개월 가량 지났다.
그러나 다음해 정월 초하루. 난데없이 이혼했다던 본처가 두 살 박이 아들을 데리고 설쇠러 왔다면서 나타난 게 아닌가.
나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졸도하고 말았다.
남편이 계획적으로 본처와 자식을 친정에 보내놓았던 사실을 꿈에도 몰랐으니, 나의 기구한 운명은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내가 시집간 후의 영화계는 계속 저조한 편이었다. 작품도『아리랑』을 능가할 만한 것이 나오질 못했다. 그래도 나운규 프로덕션에서는『옥 녀』『사랑을 찾아서』『사나이』『벙어리 삼 룡』등을 계속 발표했다.
『사랑을 찾아서』의 원제가『두만강을 건너서』였다는 것은 앞에도 얘기했지만 이 작품은 조선극장에서 개봉되어 크게 히트했다. 스탭과 캐스트들이 모두 두만강까지 가서 로케를 했는데, 나 선생이 회령에서 고향사람들을 불러 엑스트라로 쓰기까지 한 그 당시만 해도스케일이 큰 영화였다.
이어 만들어진『벙어리 삼 룡』은 나 선생이 심혈을 기울인 문예영화였다. 그때도 문예작품은 인기가 없었던지 흥행적으로는 실패를 가져왔다. 이에 나 선생은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던 모양인데, 나운규 프로덕션도 이후에 깨어지고 말았다.
이때『아리랑』때의 흥행사였던 임수호 씨가 나운규 프로덕션에 지방순회흥행을 제의해 왔다. 그래서 나운규 프로덕션에서는 영화『아리랑』『사랑을 찾아서』등을 가지고 배우들이 지방순회공연을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영화인 지방순회의 첫 케이스가 된 것이었다.
지방에서는「영화배우 무대실연의 밤」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선전을 했고 배우들은 영화 앞뒤에 연극을 공연했다. 이때 각지방에서의 인기는 놀랄만했었다.
대구 만 경관과 평양의 금 천 대좌에서는 극장 2층 기둥이 내려앉을 정도로 만원이었고, 파리보다 기생수가 조금 많다던 진주에서는 배우들이 기생사태를 만나 혼 줄을 빼기도 했다.
나운규 프로덕션도 깨지고 실의에 차있던 나 선생이 재기를 노리고 만든 작품이 바로 『아리랑』2편이었다. 처음『아리랑』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나를 재등장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시집간 사람을 불러올 수도 없고 해서 나와 비슷한 여자를 픽업해서 영희 역으로 썼다.
이때 등장한 배우가 조선 권 번(기생조합)에서 찾아낸 임송서 씨였다. 주연은 나운규·윤봉춘·임송서씨 등이었고 감독은 나운규씨와 이구영씨가 공동감독 비슷했다.
『아리랑』2편은 원 제목이『아리랑 그 후 이야기』였다. 스토리도 1편에 이은 것이었는데 시나리오는 청량리에 있던 신영균씨의 집이 커 그 사랑채에서 집필했다. 나 선생과 이구영씨는 제작사인 원 방 각 사에서 진행 비로 돈 10원을 타다가 땅콩을 가마니로 사다놓고 이틀만에 다 먹어치우기도 했다.
『아리랑』2편은 영진 이가 감옥에서 나와보니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전염병은 당시 매국노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다시 영 진이 독립운동을 위해 방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1편에는 없던 영 진의 애인이며 독립투사 역을 만들어 유신방 씨가 출연했다. 1편에서 출연했던 남궁운 주인규씨 등은 이때쯤에는 사상이 달라 상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영화 제작 때 당시 19살이던 기생출신 임송서 씨는 신영균씨 집에 자주 드나들다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신영균 씨는 와세다 대학출신으로 경성전기회사의 간부였는데, 이미 처자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고민하던 임송서씨는『아리랑』2편이 단성사에서 개봉된 지 며칠 후 『「아리랑」에 출연했으니 이제 한이 없다』면서 음독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